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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동영상으로 기록한 유언이 무효로 판정됐다면 이때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말한 것은 '사인증여'로 볼 수 있을까? 실제로 자녀 중 한 사람이 사인증여를 주장하면서 유언대로 재산을 받겠다며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인증여는 재산을 받을 상대에게 '죽은 뒤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사인증여의 효력을 인정할 때는 증여자의 의사와 다른 상속인과의 형평성을 따지는 등 신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언 무효되자 ‘사인증여’ 주장
지난 9월 대법원 2부는 사망한 A씨의 차남 B씨가 형제들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 판단에는 유언이나 유증이 효력이 없는 경우 ‘사인증여’로서 효력을 갖기 위한 요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A씨는 2018년 1월 7일 동영상 촬영을 통해 재산 분배에 관한 유언을 남겼다. 이 영상에는 A씨가 경남 거제시 하청면 땅 1193㎡와 2066㎡, 225㎡ 및 그 지상 건물의 지분 절반을 차남인 B씨에게 준다는 내용이 담겼다. B씨가 받는 건물의 나머지 지분과 하청면의 다른 땅 2248㎡, 863㎡는 장남인 C씨에게 주고, 딸들에게도 각각 2000만원씩 주라는 말도 했다. B씨가 이 동영상을 직접 촬영해 보관했다. B씨는 2019년 5월 A씨가 사망하자 “동영상에 나온 유언대로 ‘내 몫’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유언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무효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민법 제1067조는 '녹음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자신의 성명과 유언을 남긴 날짜를 직접 말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증인과 증인의 구술도 필요하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A씨의 재산은 법정상속분에 따라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분배됐다.
하지만 B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유언으로서는 효력이 없지만 사인증여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동영상에서 아버지가 하청면의 토지와 건물 지분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사인증여 계약의 효력이 생겼다는 논리다. B씨는 2020년 11월 형제들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하급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B씨의 청구를 기각했지만 2심은 받아들였다. 2심 재판부는 “원고가 부친의 사인증여 의사를 승낙하기만 하면 원고와 부친간 사인증여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동영상에 피고들이 동의하는 장면이 있어야 원고에 대한 사인증여의 효력이 생긴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 “다른 형제들 동의 구했어야”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원고는 동영상의 유언이 민법에 정해진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 효력이 없다는 점을 스스로 전제하고 있다”며 “망인이 유언하는 자리에 원고가 동석해 동영상 촬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원고와 의사가 합치된다고 보는 것은 재산을 배우자와 형제들에게 분배하고자 한 망인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았던 다른 형제들에게는 불리하고 원고만 유리해지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대법원은 “증거로 제출된 동영상을 보더라도 원고와 망인 사이에서만 유독 청약과 승낙이 이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또 “망인이 유언이 효력이 없게 되는 경우 다른 자녀들과 무관하게 B씨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유언대로 재산을 분배해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볼 사정도 없다”고 밝혔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