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뼈대만 남은 파빌리온…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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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가건물 뜻하는 '파빌리온'
이벤트로 잠시 만들었다 해체
익숙한 장소에 '새로움' 부여
英 서펜타인 갤러리, 매년 여름 제작
나무·우산 등 콘셉트로 상상력 뽐내
임시 가건물 뜻하는 '파빌리온'
이벤트로 잠시 만들었다 해체
익숙한 장소에 '새로움' 부여
英 서펜타인 갤러리, 매년 여름 제작
나무·우산 등 콘셉트로 상상력 뽐내
건축물은 한 번 지어지면 대체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킨다. 이런 건축물이 모여 장소의 고유한 이미지가 형성되고, 형성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건축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까. 꿈에서 본 장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파빌리온(pavilion)은 이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물이다. 파빌리온의 어원은 ‘나비’를 뜻하는 라틴어 파필리오(papilio). ‘임시 가설물’인 이것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일정한 기간만 세워진다.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사라짐을 염두에 두고, 끝에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그 의미가 완성된다. 그래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물들보다 여러 가지 제약에서 자유롭고 이벤트적 의미가 강한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이 이벤트성은 장소가 가진 이미지의 고유성에 반하는, 낯섦과 새로움을 장소에 부여한다.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있는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여름 새로운 파빌리온을 갤러리 옆에 선보인다. 공원에 펼쳐진 넉넉한 자연을 배경으로 설치되는 파빌리온은 갤러리의 훌륭한 설치 작품이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어려운 런던에 건축적 실험이기도 하다.
매년 새롭게 선정된 건축가들이 자유롭게 디자인을 제시하는 이 프로젝트는 2000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자로도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가 삼각형이 돋보이는 구조를 활용해 파빌리온의 기본형인 ‘천막’의 새로운 개념을 보여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설치된 파빌리온들은 공원이 가진 자연 사이를 부유하며 주변 환경에 녹아들거나(2009년), 건축가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특색을 하이드파크에 불러오기도 했고(2018년), 놀이공간과 같은 공간을 공원에 구현하기도 했다(2015년). 2012년에는 과거 파빌리온들의 흔적을 중첩한 고고학적 방식으로 새로운 장소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22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소재와 기술, 창의적인 디자인이 등장했다. 파빌리온은 전시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며 그 임무를 다했다. 2023년, 올해의 파빌리온은 공원에 굳건하게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닮았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리나 고트메가 설계한 이 파빌리온은 펼쳐놓은 우산을 연상시키는 지붕과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그리고 내외부의 경계를 형성하는 패널의 조합으로 구성됐다.
공간 바닥에까지 모두 각각의 역할에 적합한 목재가 사용돼 파빌리온이 가진 나무의 인상은 더 강화된다. 내부에서는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지붕의 구조와 패널의 패턴 덕에 마치 나무 기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패널에는 식물의 이파리를 연상시키는 패턴이 타공돼 있는데 이는 공원과 부드러운 경계를 형성한다. 파빌리온의 이런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고민한 땅, 자연, 환경과의 관계가 반영된 결과다.
파빌리온 실내에는 공간의 중앙에 떨어지는 빛과 패널이 형성하는 경계를 따라 놓여있는 테이블, 그리고 의자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위치를 선택하고 거기 앉을 수 있다. 혼자서 생각하거나 함께 온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소통하면 된다.
아 타블르( table)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 파빌리온이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다. 올해 두드러졌던 이 대화와 소통의 기능은 20여 년 동안 설치된 서펜타인 파빌리온들이 하이드파크를 찾은 시민들에게 제공해온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여름날 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불현듯 등장한 낯선 건물에서 잠시 머물며 쉬고 각자의 소소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대해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은 2013년의 파빌리온에서다. 소우 후지모토가 설계한 이 파빌리온은 백색의 경량 철골이 만들어내는 격자구조가 무수히 반복되며 파빌리온의 형태와 공간을 형성했다.
파빌리온 곳곳에 사람들이 올라 앉아있는 장면은 마치 이들이 구름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녹색으로 가득한 공원을 배경으로 백색의 촘촘함이 모여 만들어낸 한여름 낮의 꿈 같은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지금 꿈처럼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파빌리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오로지 기억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잠깐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홀연히 날아가 버리는 나비처럼 말이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
파빌리온(pavilion)은 이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물이다. 파빌리온의 어원은 ‘나비’를 뜻하는 라틴어 파필리오(papilio). ‘임시 가설물’인 이것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일정한 기간만 세워진다.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사라짐을 염두에 두고, 끝에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그 의미가 완성된다. 그래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물들보다 여러 가지 제약에서 자유롭고 이벤트적 의미가 강한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이 이벤트성은 장소가 가진 이미지의 고유성에 반하는, 낯섦과 새로움을 장소에 부여한다.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있는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여름 새로운 파빌리온을 갤러리 옆에 선보인다. 공원에 펼쳐진 넉넉한 자연을 배경으로 설치되는 파빌리온은 갤러리의 훌륭한 설치 작품이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어려운 런던에 건축적 실험이기도 하다.
매년 새롭게 선정된 건축가들이 자유롭게 디자인을 제시하는 이 프로젝트는 2000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자로도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가 삼각형이 돋보이는 구조를 활용해 파빌리온의 기본형인 ‘천막’의 새로운 개념을 보여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설치된 파빌리온들은 공원이 가진 자연 사이를 부유하며 주변 환경에 녹아들거나(2009년), 건축가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특색을 하이드파크에 불러오기도 했고(2018년), 놀이공간과 같은 공간을 공원에 구현하기도 했다(2015년). 2012년에는 과거 파빌리온들의 흔적을 중첩한 고고학적 방식으로 새로운 장소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22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소재와 기술, 창의적인 디자인이 등장했다. 파빌리온은 전시 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며 그 임무를 다했다. 2023년, 올해의 파빌리온은 공원에 굳건하게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닮았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리나 고트메가 설계한 이 파빌리온은 펼쳐놓은 우산을 연상시키는 지붕과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그리고 내외부의 경계를 형성하는 패널의 조합으로 구성됐다.
공간 바닥에까지 모두 각각의 역할에 적합한 목재가 사용돼 파빌리온이 가진 나무의 인상은 더 강화된다. 내부에서는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지붕의 구조와 패널의 패턴 덕에 마치 나무 기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패널에는 식물의 이파리를 연상시키는 패턴이 타공돼 있는데 이는 공원과 부드러운 경계를 형성한다. 파빌리온의 이런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고민한 땅, 자연, 환경과의 관계가 반영된 결과다.
파빌리온 실내에는 공간의 중앙에 떨어지는 빛과 패널이 형성하는 경계를 따라 놓여있는 테이블, 그리고 의자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위치를 선택하고 거기 앉을 수 있다. 혼자서 생각하거나 함께 온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소통하면 된다.
아 타블르( table)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 파빌리온이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다. 올해 두드러졌던 이 대화와 소통의 기능은 20여 년 동안 설치된 서펜타인 파빌리온들이 하이드파크를 찾은 시민들에게 제공해온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여름날 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불현듯 등장한 낯선 건물에서 잠시 머물며 쉬고 각자의 소소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대해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은 2013년의 파빌리온에서다. 소우 후지모토가 설계한 이 파빌리온은 백색의 경량 철골이 만들어내는 격자구조가 무수히 반복되며 파빌리온의 형태와 공간을 형성했다.
파빌리온 곳곳에 사람들이 올라 앉아있는 장면은 마치 이들이 구름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녹색으로 가득한 공원을 배경으로 백색의 촘촘함이 모여 만들어낸 한여름 낮의 꿈 같은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지금 꿈처럼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파빌리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오로지 기억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잠깐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홀연히 날아가 버리는 나비처럼 말이다.
배세연 한양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