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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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 황기(黃琦) / 화수도교본(花手道敎本) / 조선문화교육출판사 / 1949년 5월 30일 발행
― 황기(黃琦) / 화수도교본(花手道敎本) / 조선문화교육출판사 / 1949년 5월 30일 발행
태권도 교본(敎本)에 관한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저술
태권도(跆拳道,Taekwon-Do)는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 또는 방어하는 우리 전통의 무예(武藝)로서, 비교적 현대에 형성되었다. ‘태권도’라는 명칭이 1960년대 이후에 비로소 정착됐다는 사실만 봐도 그 현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명칭들이 우리 무예 혹은 무술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까. 다른 나라 무예와 우리 전통의 무예는 서로 어떤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태권도는 오롯이 우리 전통의 고유한 무예라고 할 수 있을까.이러저러한 의문이 고개를 드는 가운데 의구심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관련 문헌을 살펴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소장본 중 눈에 띈 책이 바로 『花手道敎本(화수도교본)』이었다. 태권도 혹은 우리나라 무예에 관한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그리하여 2011년에 근대체육유물로도 지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더욱 관심이 솟았다. 나아가 화수도(花手道)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당수도(唐手道)와 함께 가장 널리 쓰이던 대중무예의 이름이었다니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태권도 전문 연구자에 따르면 “태권도 관련 서적과 교본은 해방 후 발흥한 현대 맨손 타격무예의 토양과 흐름 속에서 산출된 문화적 소산이기 때문에 초창기 출간된 무예 서적들을 통해 추후 태권도로 편입된 갖가지 맨손무예의 명칭을 알 수 있다.”1)고 한다.
실제로 1944년 설립된 청도관을 중심으로 광복 이후 일본에서 유학하던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당수를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5대 기간도장[청도관(靑濤館), 지도관(智道館), 무덕관(武德館), 창무관(彰武館), 송무관(松武館)]이 설립되었는가 하면, 이후 40여 개의 군소도장이 난립하는 시기를 거쳐 1973년 9개관(송무관, 한무관, 창무관, 무덕관, 오도관, 강덕원, 정도관, 지도관, 청도관)으로 정립되었다. 이어 1978년에는 정부의 유사무예 단체 일원화 정책에 따라 대한태권도협회가 설립됨으로써 모든 행정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이 통일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먼저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살펴본 국기원2)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들어온 외래무예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우리 전통무예와 결합하여 거듭나면서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그것이 태권도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 해방 이후 발행된 우리 무예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에서만큼은 다른 의견이 없다는 점에서 『화수도교본』은 남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한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화수도, 당수도, 수박도 그리고 태권도에 이르는 여정의 출발점이 된 책
황기(黃琦, 1914~2002). 그는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서 그곳에서 중국 무예를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기의 무력(武歷)을 입증할 만한 사료(史料)가 남아 있지 않아 일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직후(1946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함) 서울 용산역 부근의 운수부(교통부) 청사에서 ‘운수부우회(運輸部友會) 당수도부(唐手道部)’를 만들었다. 이것이 곧 도장(道場) 무덕관(武德館)의 전신인 셈이다.용산의 운수부 청사를 사용했고 관원 대부분이 철도국 직원들이어서 ‘철도국 도장’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후 철도국을 통해 각 지방의 기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으며, 무덕관 승급심사 때마다 청도관의 이원국 관장과 송무관의 노병직 관장이 왕래하면서 황기 관장과의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연유로 나중에 무덕관과 청도관은 서로 경쟁관계를 유지하면서 초창기 태권도를 발전시켰다.
황기 관장은 1953년에 ‘대한당수도협회’를 설립하는 한편, 1955년 서울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새로 개관하면서 그 해에만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개관했다. 또한 같은 해 한․중 친선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는 해방 후 무예에 관한 최초의 국제행사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황기 관장은 홀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3)를 연구하여 수련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수박희(手搏戱)4)에 심취하여 1960년에는 협회 이름을 ‘대한수박도회’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의 수박도(手搏道)5)는 유사단체를 통합하라는 공권력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모든 관(館)이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로 통합되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는 해체된 것이 아니라 단증을 통합 발급했을 뿐 수련방식 등에 있어서는 각 관의 전통을 유지했다.
이때 황기 관장은 모든 관들을 하나의 협회로 통합하라는 정부의 지시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무덕관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1965년에 이르면 창시자 황기 관장은 무덕관에서 제명되고 무덕관은 통합의 길에 동참하게 된다. 당시 무덕관은 5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고 한다.
이제 다시 《화수도교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초보자용으로 보급하기 위해 초판 3,000부를 발행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6.25)이 터지는 바람에 공급망이 끊기고 말았다. 따라서 초판 중 몇 부 정도가 민간에 보급되었는지, 현재 몇 부가 남아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책의 크기는 가로 125mm, 세로 182mm로 4✕6판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앞표지는 모두 세로글씨의 한자(漢字) 서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에 손글씨 비슷한 서체의 제목 ‘花手道敎本(화수도교본)’이 큰 활자로 새겨져 있다. 그 오른쪽 상단에 지은이 표시로써 ‘黃琦 著(황기 저)’, 그리고 제목 위에는 세 줄에 걸쳐 ‘心身修鍊法(심신수련법)/防攻術法(방공술법)/保身術法(보신술법)’이란 활자가, 제목 아래에는 두 줄에 걸쳐 ‘花郞道(화랑도)와/唐手道(당수도)’란 글자가 표기되어 있다. 또, 왼쪽 아래에는 ‘前篇(전편) 初步者用(초보자용)’이란 활자가 보이는데, 이로써 이 책은 뒤에 나올 책을 염두에 두고 초보자를 위해 먼저 발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1> 참조
뒤표지를 보면 한가운데에 수련생 두 사람이 대련(對鍊) 중인 장면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고, 아래에 ‘朝鮮文化敎育出版社(조선문화교육출판사)’라는 발행처의 이름과 ‘380원’이라는 가격 표시가 보인다.
<사진2> 참조
<사진3> 참조
속표지를 넘기면 저자의 서문(序文)이 이어지는데, 그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진4> 참조
저자는 해방 전부터 斯道(사도)에 관심을 두어 왔든바 여일(如一)하지 못하여 隱忍自重(은인자중)하여 오든바 행운 중에도 행운을 마저 해방이 되자 영원의 희망을 가득 품고 斯道發展(사도발전)에 노력하여 오든바, 諸賢(제현)의 指導(지도)와 鞭撻(편달)로 말미아마 순조로운 발전을 보고 있으나 然(연)이나 斯道(사도)가 해방 이후부터 비로서 우리나라에 표면화하니마치 時日(시일)과 歷史(역사)가 薄弱(박약)함으로 인하여 반드시 대중화하여야만 할 것이 일반대중에게 일읍 조차 물나 認識(인식)이 부족한 관계로 일부 오해 또는 普及(보급)의 부족 등이 有(유)함으로 此(차)를 이 기회에 改善(개선)하여 일반대중의 인식을 바로이하여 진정한 보급에 이바지함이 要點(요점)이요 또 특히 斯道(사도)는 우리나라만 독특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연적이고 실천적이고 文武(문무)를 謙養(겸양)하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 독특한 花郞道(화랑도)에 그의 뿌리를 박고 嚴然(엄연)히 서 있기 때문이다. 특히 此期會(차기회)에 이를 强調認識(강조인식)시키는 데도 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임이 斯道(사도)에 入門(입문)한 사람은 물론 앞으로 斯道修鍊(사도수련)에 입문할 사람에 대하여도 저자가 십여 년간 廣範圍的硏究(광범위적연구)와 體驗(체험)을 토대로 하여 精正(정정)의 精正(정정)을 거듭한 바를 유감없이 발휘하려 執筆(집필)한 바 現下(현하) 財政的其他惡環境(재정적기타악환경)으로 인하여 보급은 물론 本書發刊(본서발간)에 있어서도 완벽을 기함에 如一(여일)하지 못한 점도 有(유)하오나 然(연)이나 我邦(아방)에서는 최초의 珍書籍(진서적)이요 또 최초의 發刊(발간)으로서 기타에 此(차)하여 絶對遜色(절대손색)이 없으며 또 初步者用(초보자용)으로는 그의 使命(사명)을 다한 것으로 확신하며 세상에 공표함에 있어 讀者諸賢(독자제현)의 多大(다대)한 愛援(애원)과 미숙하고 不備(불비)한 점을 詳解(상해)하시며 今後(금후) 많은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誠心(성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저자의 서문에 이어 당시 수련생 대표로 짐작되는 김은창(金恩昌)이란 인물이 저자를 소개하는 글을 2쪽에 걸쳐 싣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진 두 장이 보인다. 앞에는 ‘著者近影(저자근영)’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황기 관장의 모습이고, 다음 쪽에는 ‘화수도 수련원 간부 일동’이란 제목의 사진과 함께 ‘중앙 황사범’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맨 앞줄 가운데 앉아 있는 인물이 황기 관장인 듯하다. 하지만 두 사진 모두 세월의 흔적에 가려 식별이 쉽지 않은 상태인 것이 아쉽다.
<사진5-1> <사진5-2> 참조
한편, 서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사도(斯道)’인데, 이는 저자가 ‘화수도’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본문(37~38쪽) 중에도 다시 등장한다.
‘花(화)’자는 과거의 화랑도의 頭字(두자)를 채택한 것이니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으로 비추어 보드라도 의미심장한 바가 있음은 재언은 불요하니 <중략> ‘手(수)’자는 당수도의 수자를 인용함도 되지마는 수라함은 손을 의미함이요 또 사람을 표현함이요 나가서는 자격 실력이나 물리학적 표현도 되어 어원, 어감도 대단히 부드러워 넉넉이 斯道(사도)의 대표어로서 채택되어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된다.
<중략> ‘道(도)’자인데 이 자는 고래로부터 전하야 내려온 말이며 이에 대하여는 현명한 세인이 다 주지하는 사실임으로 多言(다언)을 피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삼문자로 합하여 ‘花手道(화수도)’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사도’란 일종의 무술, 즉 ‘사도무술’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전통무예 중 하나로 알려진 ‘국술(國術)’을 주창한 ‘서인혁’이라는 인물이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1958년에 창립했다는 ‘국술원(國術院)’이란 단체의 홈페이지(www.kuksoolwon.or.kr)에 따르면 사도무술은 각종 무술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다고 한다.
“BC 2000여 년 전부터 AD 900여 년대까지 약 3000년간 끊임없이 연마되어온 무술”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기 관장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당수도(唐手道)’라는 단어를 단념하지 않았다. 『화수도교본』이 1958년에 『唐手道敎本(당수도교본)』(계량문화사)이란 제목으로 수정 증보되어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화수도교본』을 보면, 저자 소개의 글을 넘기면 비로소 목차가 나온다. 목차에 따르면 이 책은 모두 5편으로 나뉘는데, 1편은 總論(총론), 2편은 精神修鍊上具體的行事方法(정신수련상구체적행사방법), 3편은 體育向上上具體的行事方法(체육향상상구체적행사방법), 4편은 原型(원형), 5편은 對鍊(대련) 등으로 제목을 정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교본답게 실제적인 동작을 구현한 사진들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사진7> 참조
<사진8> 참조
<사진9> 참조
우리 전통무예로 거듭난 태권도,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점령하다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교본은 최홍희(崔泓熙, 1918~2002)가 1959년 펴낸 『跆拳道敎本(태권도교본)』(성화문화 발행)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듯하다. 1955년경 옥편(玉篇)을 뒤져 ‘태권도’라는 이름을 지은 끝에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아울러 비슷한 시기에 태권도는 육군사관학교 정규 교과과정으로 채택되어 1959년 9월, 생도 교재용으로 태권도 교본이 편찬되기도 했다. 청도관의 창시자 이원국(李元國, 1907~2003)은 1968년에 『跆拳道敎範(태권도교범)』(진수당 발행)을 펴냈다. 이후 대한태권도협회와 세계태권도연맹 등 여러 단체가 출범했고, 각기 공인 교본을 발행했다.
국기원은 1987년 『국기태권도교본』(삼훈출판사 발행)을 펴냈으며, 이후 수정 증보를 거쳐 2005년에는 『Taekwondo Textbook 태권도교본』이라는 제목의 영문과 한글 혼용 교본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한편, 해방 후 민간 도장의 5대 문파(門派)로 알려진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조선 연무관), 창무관(YMCA 권법부), 송무관 등을 이끈 사람들 중에서 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 2대 관장 손덕성, 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 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 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바 사도(斯道) 문파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우리 태권도의 산 증인들이 대부분 미국에 자리를 잡고 새로이 도장(道場)의 문을 엶으로써 태권도가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태껸’을 비롯한 우리 전통의 무예들이 이른바 사도(斯道)라는 이름으로, 세도가(勢道家)의 집안을 통해서든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사찰을 통해서든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외래무술과 그것이 결합하여 오늘날 태권도라는 세계적인 무예로 거듭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냇물이 모여들어 거대한 강줄기를 만드는 것처럼 한두 사람의 공력이 아닌 수많은 무예인들의 숭고한 노력이 보태져서 태권도라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이 글의 깔끔한 정리를 위해 어느 태권도 연구자들의 논문 초록을 인용하면서 『화수도교본』에 대한 태권도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를 기대해 본다.
전통태권도의 기법체계를 구축함에 있어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과거와 현재 기법들의 비교분석은 필수적이다. 이에 태권도 관련 서적 중 가장 오래된 『화수도 교본』과 『태권도 교본』에서 제시된 기법들의 공통성과 상이성을 확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1) 김영선(2014), “최초의 태권도 교본에 관한 연구”, 《태권도연구》 제5권 제2호, 국기원, 2쪽.
분석결과, 화수도와 태권도의 기법들은 외형적인 공통성은 있으나 실전 및 기법해석에서는 다른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두 교본의 기법들이 역사적 변화과정에서 서로 이어져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각 유파의 특징과 전통이 내재된 기법체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70년의 역사 속에서 사회문화적 요소에 의해 변용된 현대 태권도의 초기기법으로서 전통성을 가질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도외시했던 초기기법에 대한 재인식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초기 교본에 대한 기법의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러한 연구들이 태권도 형성사에서 전통기법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기대된다.6)
2)국기원(國技院, World Taekwondo Headquarters)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무관청인 특수법인으로, 1972년에 설립된 중앙도장으로서 세계태권도의 본부이자 세계태권도연맹(WT)의 모체이다. 또한 국기원에서는 품단증과 각종 자격증을 발행하고, 태권도 인구 저변확대를 위하여 요구되는 연구, 교육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국제기관이다. 또한 연중행사로는 세계태권도한마당이 있고, 무도나 스포츠태권도의 중흥 발전에도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출처: 위키백과.
3)조선후기 학자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왕명에 따라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편찬한 무예서. 4권 4책. 목판본.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임진왜란 후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의 『무예제보(武藝諸譜)』, 1759년(영조 35) 『무예신보(武藝新譜)』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체재는 첫머리에 정조의 서(序)를 비롯하여 범례, 병기총서(兵技總敍), 척·모사실(戚茅事實), 기예질의(技藝質疑), 인용서목(引用書目) 등이 있으며, 본문에는 24종의 병기(兵技)를 수록하였고, 책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를 간략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만 있었다.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도보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무예 수박(手搏)을 놀이로 삼은 것. 수박은 수박(手拍), 권법(拳法), 슈벽, 수벽치기, 수벽타(手癖打)로도 불렀다.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5)당수도(唐手道)는 중국 당나라 때의 무술이라는 의미로 쓰일 뿐만 아니라 일본식 발음으로 ‘가라테’여서 우리 무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이에 우리 전통의 무예라는 뜻을 담아내고자 고심한 끝에 ‘수박도’라는 명칭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6)임신자 외(2019), 「전통태권도 기법체계 구축을 위한 『화수도 교본』과 『태권도 교본』의 비교 연구」 초록, 한국무예학회, 《무예연구》(통권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