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의 딸이 무슨 죄? 잊혀진 '조선의 아니 에르노' 김명순을 깨우다
"근대 최초로 등단한 여성 극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지워진 김명순의 작품과 그의 인생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지난 3~5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의붓자식'을 연출한 윤사비나(사진)의 말이다. '의붓자식'은 100년 전인 1923년 작가 김명순(1896~1951)이 쓴 동명의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사흘 간의 공연이 끝난 뒤 참신한 연출과 깊이 있는 서사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종로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하는 제6회 '종로문화다양성연극제' 선정작 중 하나다.

김명순은 작가 나혜석·김원주 등과 함께 대표적인 근대 초기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작가다. '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조선 세번째 여성 기자 등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기생 출신 첩의 딸이라는 꼬리표와 일본 유학 중 겪은 강간사건 등으로 문단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첩의 딸이 무슨 죄? 잊혀진 '조선의 아니 에르노' 김명순을 깨우다
윤사비나는 2019년부터 지난 4년 간 김명순을 기록하는 데 '올인'했다. '의붓자식'을 비롯해 김명순의 또 다른 희곡 '두 애인' 원작을 현대적으로 의역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2020년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를 시작으로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공연 '언도큐멘타', 2021년 '인터랙티브 시어터' 등 다양한 형태로 작가 김명순과 그의 희곡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이어갔다. 최근 TV 드라마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 옥자연도 남산예술센터 공연에서부터 함께 무대에 선 인연으로 이번 작품에 출연했다.

"김명순의 작품은 마치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처럼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김명순이란 중요한 작가의 희곡이 무대화됐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일종의 소명감을 갖고 작품을 만들었어요."

이번 작품은 김명순이 쓴 원작 희곡에 그의 수필과 시, 역사적 기록 등을 참고해 드라마를 완성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의붓자매 성실·부실·탄실 등 세 자매 각각의 모습엔 모두 작가 김명순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한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내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무대 위로 객석을 올려 관객들이 무대를 둘러싸고 앉게 만들었다.
첩의 딸이 무슨 죄? 잊혀진 '조선의 아니 에르노' 김명순을 깨우다
"원래 객석이 600석 정도 되는 큰극장인데, 일부러 원래 있던 객석을 텅 비우고 무대 위에 의자를 100개 정도 두는 식으로 관객들의 자리를 마련했어요. 관객이 제3자로서 김명순의 이야기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그의 인생을 같이 '체험'하도록 만들고 싶어서요."

소수자의 외침도 사회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윤사비나는 "이 작품은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여성을 넘어서 전체 소수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며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 때문에 한 개인의 꿈과 열정이 무시돼선 안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사비나는 당분간 '김명순 기록 작업'을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김명순이 쓴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와 그의 인생을 좀더 연구해서, 그의 삶 전체를 다루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장르에 관계없이 김명순의 인생을 오롯이 담아내고 싶어요."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