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말란은 왜 하필 오두막의 '동성애 가족'을 파괴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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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정민의 세상을 뒤집는 예술읽기
영화 <똑.똑.똑>
영화 <똑.똑.똑>
어느 가족이 평화롭게 휴가를 즐기는 호숫가 외딴 오두막에, 딱 봐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거구의 사내와 무시무시한 연장을 든 몇몇 사람이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똑.똑.똑.
이상하죠? 문을 부수고도 남을 정도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와 살벌한 연장을 손에 쥔 사람들이 노크는 왜 하는 것이며, 가족이 놀랄까봐 안심을 시키면서도 창문이나 현관문을 가리지 않고 얼른 문을 열라고 재촉합니다.
당연히 집안에 있던 가족은 이 기이한 상황에 놀라 필사적으로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지요.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탈출을 모색하고, 억지로 들어오려는 침입자와 몸싸움을 해보지만 아이 아빠는 부상을 당하고 결국 이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침입자들은 온 가족을 꽁꽁 묶어놓더니 다음과 같은 황당한 말을 공손하게 말합니다.
자신들은 지구멸망의 예언을 듣고 그것만은 막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이며, 당신 가족 중 한 명이 다른 가족 한명을 죽이는 순간 온 인류는 구원을 받게 된다고요. 그러면서 TV를 틀어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멸망의 징후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방송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기들이 한명씩 제물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니,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며 몸이 묶인 가족이 보는 앞에서 침입자 일행 중 한명이 끔찍하게 제물로 바쳐집니다. 어린 시절 방과 후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놀다보면 늦은 오후 정확한 시간에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펄럭이던 태극기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근처에 있던 모든 어린이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런 다짐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없이 해왔고,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의외의 장소에서 이런 다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의’ 목숨을 바쳐야할지 아직 고민해 본 적이 없고, 만약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실제 목숨을 바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결심과 선택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나마, 항일투쟁, 반공투쟁, 민주화투쟁과 조국과 민족, 혹은 정의와 후손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숭고한 가치가 있고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세대인 나에게도, 영화의 설정은 황당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살리기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니 말입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제발 죽여 달라며 불법침입자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통사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좀 더 영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 가족은 평범하진 않습니다. 우선 백인 게이커플인 두 명의 아빠가 선천적 장애가 있던 중국인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죠. 다른 가족과 구성원이 좀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고 행복한 하나의 팀이자 가족입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나오는 과거 이야기를 통해, 이 커플의 탄생과 입양을 통한 가족으로의 탄생까지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함께 극복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함께 겪었을 고통과 마음투쟁의 시간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한편 침입자들을 살펴보면,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고 절규하는 교사, 평범한 회사원, 헌신적이었던 간호사, 그리고 그 와중에 아이에게 달걀요리를 만들어 먹이는 착한 요리사입니다. 이들은 어느 날 지구멸망의 예지몽을 꾼 다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원작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이 장소, 그러니까 ‘세상 끝의 오두막’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가족을 설득하여 지구멸망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 끝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칩니다. 영화의 이런 황당한 설정이 대중의 공감을 끝내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흥행성적도 또 평점도 시원찮으니까요.
뭐 처참한 흥행성적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영화의 설정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왜 하필 그 가족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 부부와 입양아 등 그 가족 구성원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입니다. 그 설정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죠. 반대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사회가 지속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하는데 반사회적 범죄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견을 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의롭진 않지만 효율적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공리주의에 따라, 단 한사람의 희생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들에 비해 특별히 정의롭지 못할 이유는 없죠.
많은 흥행작을 만들어낸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바로 이 설정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큰 울림이 있습니다. ‘진짜 그러한가’ 하는 것이죠. 절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진짜 괜찮은가?! 다중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에 있어서 소수자, 약자, 가난한 자들의 희생이 아무렇지 않게 전제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지몽을 꾼 침략자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오두막은, 세상의 많은 편견과 혐오를 견디며 일궈온 한 가정의 안식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내일 지구멸망이 오더라도, 가족은 인류구원 대신 다함께 꼭 끌어안고 종말을 맞을 수도 있었겠죠. 그 선택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똑.똑.똑.
이상하죠? 문을 부수고도 남을 정도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와 살벌한 연장을 손에 쥔 사람들이 노크는 왜 하는 것이며, 가족이 놀랄까봐 안심을 시키면서도 창문이나 현관문을 가리지 않고 얼른 문을 열라고 재촉합니다.
당연히 집안에 있던 가족은 이 기이한 상황에 놀라 필사적으로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지요.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탈출을 모색하고, 억지로 들어오려는 침입자와 몸싸움을 해보지만 아이 아빠는 부상을 당하고 결국 이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침입자들은 온 가족을 꽁꽁 묶어놓더니 다음과 같은 황당한 말을 공손하게 말합니다.
자신들은 지구멸망의 예언을 듣고 그것만은 막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이며, 당신 가족 중 한 명이 다른 가족 한명을 죽이는 순간 온 인류는 구원을 받게 된다고요. 그러면서 TV를 틀어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멸망의 징후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방송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기들이 한명씩 제물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니,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며 몸이 묶인 가족이 보는 앞에서 침입자 일행 중 한명이 끔찍하게 제물로 바쳐집니다. 어린 시절 방과 후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놀다보면 늦은 오후 정확한 시간에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펄럭이던 태극기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근처에 있던 모든 어린이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런 다짐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없이 해왔고,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의외의 장소에서 이런 다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의’ 목숨을 바쳐야할지 아직 고민해 본 적이 없고, 만약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실제 목숨을 바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결심과 선택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나마, 항일투쟁, 반공투쟁, 민주화투쟁과 조국과 민족, 혹은 정의와 후손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숭고한 가치가 있고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세대인 나에게도, 영화의 설정은 황당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살리기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니 말입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제발 죽여 달라며 불법침입자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통사정을 하고 있으니까요.
좀 더 영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 가족은 평범하진 않습니다. 우선 백인 게이커플인 두 명의 아빠가 선천적 장애가 있던 중국인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죠. 다른 가족과 구성원이 좀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고 행복한 하나의 팀이자 가족입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나오는 과거 이야기를 통해, 이 커플의 탄생과 입양을 통한 가족으로의 탄생까지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함께 극복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함께 겪었을 고통과 마음투쟁의 시간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한편 침입자들을 살펴보면,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고 절규하는 교사, 평범한 회사원, 헌신적이었던 간호사, 그리고 그 와중에 아이에게 달걀요리를 만들어 먹이는 착한 요리사입니다. 이들은 어느 날 지구멸망의 예지몽을 꾼 다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원작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이 장소, 그러니까 ‘세상 끝의 오두막’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가족을 설득하여 지구멸망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 끝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칩니다. 영화의 이런 황당한 설정이 대중의 공감을 끝내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흥행성적도 또 평점도 시원찮으니까요.
뭐 처참한 흥행성적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영화의 설정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왜 하필 그 가족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 부부와 입양아 등 그 가족 구성원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입니다. 그 설정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죠. 반대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사회가 지속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하는데 반사회적 범죄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견을 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의롭진 않지만 효율적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공리주의에 따라, 단 한사람의 희생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들에 비해 특별히 정의롭지 못할 이유는 없죠.
많은 흥행작을 만들어낸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바로 이 설정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큰 울림이 있습니다. ‘진짜 그러한가’ 하는 것이죠. 절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진짜 괜찮은가?! 다중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에 있어서 소수자, 약자, 가난한 자들의 희생이 아무렇지 않게 전제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지몽을 꾼 침략자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오두막은, 세상의 많은 편견과 혐오를 견디며 일궈온 한 가정의 안식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내일 지구멸망이 오더라도, 가족은 인류구원 대신 다함께 꼭 끌어안고 종말을 맞을 수도 있었겠죠. 그 선택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