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 투자를 펼쳐온 국내 배터리 셀·소재 업체들이 잇따라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의 합작 투자를 연기하고 자체 증설 계획을 미루는가 하면 일부 업체는 신사업 진출도 재검토하기로 했다. 급성장하던 전기차 시장이 숨 고르기 국면에 접어들어서다. 숨 가쁜 사업 확장으로 재무 부담과 공급 과잉, 수율 문제 등에 시달리던 배터리업계에선 “내실을 다질 기회”라는 반응이 나온다.
'공격 투자' K배터리, 속도 조절 나선다

LG엔솔·포드 합작 연기 가능성

7일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과 미국 포드, 튀르키예 코치그룹은 올해 말 착공을 목표로 준비하던 튀르키예 배터리 합작공장 프로젝트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 3사는 올 2월 업무협약을 맺고 이 공장에서 2026년부터 연 25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앙카라 인근 바슈켄트 지역에 부지 정지 작업까지 마쳤지만 이후 진전이 없는 상태”라며 “최근 포드의 전기차 투자 축소와 업황 둔화, 현지 사정 등을 고려하면 서둘러 진행할 유인이 약하다”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착공 시점이나 지연 등은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했다.

포드는 SK온과 미국 켄터키주에 짓기로 한 2공장 가동도 당초 목표한 2026년보다 늦추기로 했다. 미국 내 인건비 상승, 전기차 수요 둔화, 전기차 부문 적자 누적 등을 이유로 기존에 계획한 전기차 투자 가운데 120억달러를 줄이겠다고 발표한 여파다.

폭스바겐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LG에너지솔루션 역시 폭스바겐의 전기차 생산 계획 축소에 맞춰 폴란드 공장 가동률을 조정할 방침이다.

소재사도 증설·신사업 연기

배터리 소재 기업들도 ‘공급 과잉’ 우려로 인해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섰다. 고려아연은 3분기 동박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내년 상반기로 미뤘다. 배터리 셀 기업의 품질 인증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동박 공급 과잉으로 제품 가격이 내려가자 고려아연이 사업 진출을 늦춘 것으로 보고 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음극재 가격은 올해 ㎾h당 7.05달러에서 내년 6.48달러로 하락할 전망이다.

고려아연은 후방 산업인 폐배터리 진출 계획은 아예 보류했다. 작년 말 미국 전자 폐기물업체 이그니오를 인수한 고려아연은 연내 현지에 폐배터리 공장을 착공할 계획이었지만 일단 중단했다. 엘앤에프도 양극재 공장 증설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 신사업으로 채택한 음극재, 리튬·인산철(LFP), 전구체 공장은 투자 규모를 줄일 방침이다. 에코프로비엠도 이날 콘퍼런스콜에서 “4분기는 양극재 물량 정체 가능성이 있다”며 “올해 시설투자 비용은 1조2000억원으로 기존 전망치보다 10%가량 적을 것”이라고 밝혔다.

배터리업계 “내실 다질 때”

확장 전략에 차질이 빚어졌지만 배터리업계에선 “시간을 벌었다”는 말도 나온다. 수년간 거듭된 대규모 투자와 그에 따른 재무 부담, 가동률 저하, 인력 수급 등 ‘과속 부작용’을 바로잡을 여유가 생겼다는 얘기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 들어 3분기까지 설비 투자에 7조6000억원을 투입해 작년 연간 규모(6조3000억원)를 이미 넘어섰다. 아직 흑자 전환을 못 한 SK온 역시 올 상반기에만 작년 연간 수준인 4조8000억원가량을 투자했다. 이에 따른 이자 부담도 상당하다. 지동섭 SK온 사장은 최근 포드와의 합작공장 지연에 “오히려 숨을 고르면서 필요한 준비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고 했다.

빈난새/강미선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