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천교 이야기


거지왕 김춘삼이 맹활약했던 근거지는 이 염천교가 '아니올시다.' 1770년에 만들어진 한양도성도를 보면 또 다른 염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김춘삼은 현재의 염천교가 아니라 청계천에 있던 염천교에서 활동했다. 청계천의 다리는 거지들의 소굴, 좋게 말하면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이 생활 하수를 버리는 곳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천 바닥에 흙과 오물들이 쌓여 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비가 오면 범람하기 일쑤였고 악취가 진동하고 불결하여 전염병의 발원지였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영조는 자신의 치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을 청계천 준설사업으로 꼽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긁어낸 흙과 오물을 멀리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인 흙과 쓰레기를 청계천 주변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여기에 꽃을 심어 방산(芳山)이라 했다. 꽃다울 방자를 써서 ‘꽃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것이다. 을지로 4, 5가와 청계천 사이에 있는 방산시장의 유례이다.
그 가짜 산, 방산에는 오갈 데 없는 거지들이 몰려와 굴을 파고 살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땅을 파고 사는 이들 거지들(땅꾼)을 어여삐 여겨 먹고 살수 있도록 뱀을 잡아 약재상에 팔도록 했다. 그래서 뱀 잡는 사람을 땅꾼이라 불렀다. 이 땅꾼의 왕초를 ‘꼭지’라 부르고 그 꼭지 중에 꼭지를 ‘꼭지딴’이라 불렀다. 고인이 된 최진실이 주인공으로 활약한 영화 꼭지딴도 그들의 이야기이다. 꼭지딴은 거지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김춘삼은 거지 중의 우두머리니 꼭지딴이다.
그 김춘삼이 살던 염천교는 서울역 앞의 염천교가 아니라 청계천 주변에 있던 염초청 근처의 염천교이니 비 오는 날 김춘삼의 흔적을 찾으려고 염천교 주변을 배회하다가는 고압선에 감전될 일이다.
그런데 염천교라 하면 물이 흘러야 마땅할 텐데 지금의 염천교 아래에는 물이 아닌 기차가 다닌다. 염천교는 분명히 물이 흐르던 하천 위의 다리였다. 만초천이라고 들어보셨는가. 도성 밖 첫 동네를 감싸 흐르던 물길이다. 그 만초천에는 6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염천교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초천은 남으로 흐르다가 아현고개와 약현(약현성당이 있는 고개) 때문에 물길이 근방에서 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1919년 남대문 정거장, 경성역 확장공사와 경의선 수색 직선화 철로 공사를 할때 이 일대에 있던 만초천 다리 중 하나가 없어졌다. 철길이 물길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염천교는 원래의 염천교가 아니다. 선로 위에 있는 다리라 해서 과선교, 이 일대가 봉래동이다.
청일전쟁 때 남대문 일대의 위기에 처한 일본인들과 만리동에 주둔해 있던 일본 군인이 만난 동네라 해서 봉래동(逢萊洞)인데 그래서 다리 이름을 봉래동에 있는 다리 봉래교라 불렀다.
1931년에 발표한 염상섭의 장편 소설 '삼대'을 보면 상훈의 첩 경애가 상훈의 아들 덕기를 남대문에서 ‘봉래교’로 바래다주는 내용이 나온다. '삼대, 문학사상, 88p'.
1931년에는 이 다리의 이름이 봉래교였다. 언제부터 염천교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염천교가 워낙 유명하니까 없어진 다리 이름을 따라서 봉래교, 과선교라 부르던 다리 이름을 염천교라 부른 것이다. 이 염천교는 그 시절에도 무척 쓸쓸한 다리였다. 염천교에는 얼마 전까지도 이미자의 노래비가 있었다.
울며 헤진 염춘교(1966) / 노래 : 이미자 (박시춘 작곡 / 영화 주제곡)
부모도 잃은 남매 정든 고향 하직하고
낯설은 서울역에 손가락에 맹세 걸고
이 년 후 추석날 밤 염천교에 달이 뜨면
돈 벌어 만나자고 울며 헤진 멍든 가슴
아~ 이 무슨 슬픈 운명 하늘 아래 두 남매

당시 영화의 스틸이 있어 소개한다. 당시의 염천교의 모습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