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래 고약' 아시나요? 서양 신부가 소년에게 건네준 당대 최고의 부스럼 치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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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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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에 내포(內浦)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지금은 ‘내포신도시’로 유명하지만, 가야산이 엄마의 품처럼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다. 서쪽에는 큰 바다가, 북쪽에는 아산만, 동쪽에 너른 들판이 있어서 바다며 산이며 지척의 모든 자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동네다. 이 동네 초입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공세리 성당이다.
‘공세리’라는 곳은 충청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서해바다와 인접해서 신부들의 왕래가 잦더니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Emile Devise 成一論)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왔다. 그는 폐허가 된 조세창고와 제당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년,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만든 고딕양식 형태이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돌을 주워다가 성당의 기초를 다졌다. 성곽돌로 사용된 돌들이 성당을 두르고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성당을 둘러 싸고 있어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아낸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혔을까? 성당으로 들어가는 마을의 편안한 지세도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한몫했다.
이 성당과 많이 닮은 성당이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의 북쪽 고딕 형태의 모습은 공세리 성당과 참 많이도 닮았다. 마치 공세리 성당을 옮겨온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동네도 이쁘고 성당도 아름다운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까지 32명의 순교자를 낼 정도로 순교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성당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전하는 방편으로 의술을 익혔다. 그가 와서 보니 마을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부스럼이나 종기가 많이 나는 것을 알았다. 드비즈 신부는 생약 처방에 관한 서양 원서와 한방 의서를 놓고 치료 약을 만들어 시험하였다. 의학에 관심이 많은데다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사람이기에 서양의학과 한방을 곁들인 동서양 의술의 결합이었다. 결과물은 부스럼을 치료하는 고약이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까만 약제를 기름종이에 싸서 종기 난 부위에 붙이니 몇 일 지나 감쪽같이 나았다. 신부는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는 소년에게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이명래’다. 이명래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0년생인 이명래는 명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신앙을 따라 집안은 공세리로 이사한 것이다. 거기에서 은인을 만났다. 신부에게 고약 제조법을 전수 받은 그는 1906년에는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고약(膏藥)은 기름이 칠해진 종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까만 약을 싼 형태의 약이다. 어릴적 종기가 나면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약국에 가서 ‘이명래 고약 사오라’고 했다. 약국에 가서 ‘고약 달라’고하면 ‘이명래 고약’을 줬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 두 명을 대라면 ‘영원한 대통령’으로만 알던 ‘박정희’와 이명래고약의 ‘이명래’일 것이다.
고약을 사 오면 어머니는 큰 팔각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고약을 녹인 다음 상처 부위에 고약이 녹은 기름종이를 붙였다. 불을 붙이는 것도 무서웠고 그것을 상처에 발라 검은 기름종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창피해서 도망 다니던 기억이 난다. 고약을 성냥불에 달궈 종기에 붙여 놓으면 며칠 뒤 누런 고름이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게 된다.
이명래는 어린 나이에 아산에서 ‘명래 한의원’을 개업해서 돈을 벌다가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 충정로가 그가 한의원을 개업한 현장이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번 소개한 충정각에서 나와 오른쪽 옆 건물이다. 긴 시간 동안 빈 건물로 있다가 현재는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퓨전 음식점으로 변했다.
한의원 시절의 풍경을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는 회고한다. "매일 300~400명의 환자들이 새벽부터 이곳에 몰려왔다. 그래서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하게 한 다음에 진찰하고 고약을 팔았다"는 것이다. 앞마당에는 날마다 진풍경이 연출되는데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고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고약을 끓이는 아궁이에 불 때는 사람, 고약에 들어갈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고약 집 앞마당에 넘쳐났다. 사업이 번창하는데 전쟁이 났다.
그게 화근이었다.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었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딸과 2남 2녀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 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하며 이명래 한의원에 불을 질렀다. 이 때 사진과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 되었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추스러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1월 7일, 전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피’‘피’외마디 소리와 함께 뇌출혈로 사망한다. 1952년 서울로 돌아온 사위 이광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명래 한의원>이란 간판을 달고 장인의 사업을 재건한다. 가업을 이을 남자가 없어 사위가 총대를 멘 것이다.
보성전문 출신인 이광재는 장인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3대 계승자인 임재형은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이광진의 뒤를 이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색다른 구조였다. ‘이명래 한의원’은 고약 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돈이 되는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익구조를 맞추기 어려워 결국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 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한편 이명래의 둘째 딸 이용재(李容載, 1922년~2009년)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서 이명래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의사인 이용재가 돌보았던 환자가 상처한 이후 우울하게 살고 있던 유진오 박사를 소개했다. 유진오(兪鎭午,1906년~1987년)는 신민당총재와 고려대 총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헌법의 기초를 만든 분이다.
그녀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관철동에 설립한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 약을 198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명래제약도 문을 닫는다.
이명래고약을 약국에 가서 달라고 하니 예상했던 옛날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명래제약이 문을 닫으며 소유권을 다른 제약사에 넘겼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절의 이명래고약은 국민의 종기와 부스럼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이명래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남아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공간은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맛집 동네로 변한 이 충정로역 뒷편의 식당에 가면 예전을 추억하며 명래한의원의 흔적을 찾아 보시기를...
이명래선생의 9형제중 우리의 현대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분이 계시다. 이순석선생, 이명래의 막내 동생이다. 그를 알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많은 것이 보인다. 다음 편에 소개한다.
‘공세리’라는 곳은 충청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서해바다와 인접해서 신부들의 왕래가 잦더니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Emile Devise 成一論)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왔다. 그는 폐허가 된 조세창고와 제당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년,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만든 고딕양식 형태이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돌을 주워다가 성당의 기초를 다졌다. 성곽돌로 사용된 돌들이 성당을 두르고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성당을 둘러 싸고 있어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아낸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혔을까? 성당으로 들어가는 마을의 편안한 지세도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한몫했다.
이 성당과 많이 닮은 성당이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의 북쪽 고딕 형태의 모습은 공세리 성당과 참 많이도 닮았다. 마치 공세리 성당을 옮겨온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동네도 이쁘고 성당도 아름다운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까지 32명의 순교자를 낼 정도로 순교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성당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전하는 방편으로 의술을 익혔다. 그가 와서 보니 마을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부스럼이나 종기가 많이 나는 것을 알았다. 드비즈 신부는 생약 처방에 관한 서양 원서와 한방 의서를 놓고 치료 약을 만들어 시험하였다. 의학에 관심이 많은데다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사람이기에 서양의학과 한방을 곁들인 동서양 의술의 결합이었다. 결과물은 부스럼을 치료하는 고약이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까만 약제를 기름종이에 싸서 종기 난 부위에 붙이니 몇 일 지나 감쪽같이 나았다. 신부는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는 소년에게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이명래’다. 이명래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0년생인 이명래는 명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신앙을 따라 집안은 공세리로 이사한 것이다. 거기에서 은인을 만났다. 신부에게 고약 제조법을 전수 받은 그는 1906년에는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고약(膏藥)은 기름이 칠해진 종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까만 약을 싼 형태의 약이다. 어릴적 종기가 나면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약국에 가서 ‘이명래 고약 사오라’고 했다. 약국에 가서 ‘고약 달라’고하면 ‘이명래 고약’을 줬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 두 명을 대라면 ‘영원한 대통령’으로만 알던 ‘박정희’와 이명래고약의 ‘이명래’일 것이다.
고약을 사 오면 어머니는 큰 팔각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고약을 녹인 다음 상처 부위에 고약이 녹은 기름종이를 붙였다. 불을 붙이는 것도 무서웠고 그것을 상처에 발라 검은 기름종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창피해서 도망 다니던 기억이 난다. 고약을 성냥불에 달궈 종기에 붙여 놓으면 며칠 뒤 누런 고름이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게 된다.
이명래는 어린 나이에 아산에서 ‘명래 한의원’을 개업해서 돈을 벌다가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 충정로가 그가 한의원을 개업한 현장이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번 소개한 충정각에서 나와 오른쪽 옆 건물이다. 긴 시간 동안 빈 건물로 있다가 현재는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퓨전 음식점으로 변했다.
한의원 시절의 풍경을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는 회고한다. "매일 300~400명의 환자들이 새벽부터 이곳에 몰려왔다. 그래서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하게 한 다음에 진찰하고 고약을 팔았다"는 것이다. 앞마당에는 날마다 진풍경이 연출되는데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고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고약을 끓이는 아궁이에 불 때는 사람, 고약에 들어갈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고약 집 앞마당에 넘쳐났다. 사업이 번창하는데 전쟁이 났다.
그게 화근이었다.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었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딸과 2남 2녀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 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하며 이명래 한의원에 불을 질렀다. 이 때 사진과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 되었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추스러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1월 7일, 전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피’‘피’외마디 소리와 함께 뇌출혈로 사망한다. 1952년 서울로 돌아온 사위 이광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명래 한의원>이란 간판을 달고 장인의 사업을 재건한다. 가업을 이을 남자가 없어 사위가 총대를 멘 것이다.
보성전문 출신인 이광재는 장인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3대 계승자인 임재형은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이광진의 뒤를 이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색다른 구조였다. ‘이명래 한의원’은 고약 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돈이 되는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익구조를 맞추기 어려워 결국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 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한편 이명래의 둘째 딸 이용재(李容載, 1922년~2009년)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서 이명래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의사인 이용재가 돌보았던 환자가 상처한 이후 우울하게 살고 있던 유진오 박사를 소개했다. 유진오(兪鎭午,1906년~1987년)는 신민당총재와 고려대 총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헌법의 기초를 만든 분이다.
그녀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관철동에 설립한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 약을 198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명래제약도 문을 닫는다.
이명래고약을 약국에 가서 달라고 하니 예상했던 옛날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명래제약이 문을 닫으며 소유권을 다른 제약사에 넘겼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절의 이명래고약은 국민의 종기와 부스럼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이명래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남아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공간은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맛집 동네로 변한 이 충정로역 뒷편의 식당에 가면 예전을 추억하며 명래한의원의 흔적을 찾아 보시기를...
이명래선생의 9형제중 우리의 현대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분이 계시다. 이순석선생, 이명래의 막내 동생이다. 그를 알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많은 것이 보인다. 다음 편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