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공예 개척자'이자 100년 전 최고 다방 주인장은 '고약왕'이명래의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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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이명래의 동생, 우리나라 공예의 개척자 이순석선생님.
-이명래의 동생, 우리나라 공예의 개척자 이순석선생님.
얼마 전 공세리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철쭉이 활짝 핀 봄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도 시원하게 쭉 뻗은 팽나무며 느티나무의 의연한 자태가 세한도의 소나무처럼 강인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혹시 성당에 '이명래 고약'의 주인공 이명래 선생의 흔적은 없을까하여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이명래와 이순석 선생의 표석이라도 세워 우리가 알아야 할 문화사를 후대에게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이명래(1890~1952)선생의 동생 이순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1905-1986)은 이명래의 막내 동생으로 큰 형인 이명래와는 15살 차이가 난다. 큰형과 사이에 7명의 형과 누나가 있었다. 9남매라니? 비혼 주의자가 넘쳐나는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4남매, 5남매만 있어도 TV에 소개되는 시대다.
생각해 보니 우리 어머니도 10남매 중 셋째였다. 전에는 다 그렇게 많이 낳아 키웠다. 아이를 낳고 그 다음날 밭 매러 나가던 시절이다. 이순석의 본명은 평래(平來)인데 아명인 ‘순돌’, 한문 ‘順石’으로 호적에 올렸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던 아이에게 걸 맞는 이름이다.
맏형이 신부의 도움으로 종기와 부스럼 치료제의 제조법을 전수받았다면 막내 순석은 신부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선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고, 그림에 재주가 많은 순석을 눈여겨 보던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그림을 직접 지도했다.
성화에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직접 그림을 지도하고 스케치와 유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동생은 형만큼이나 영리했다. 형이 의젓하게 드비즈 신부의 제약 비법을 전수 받았다면, 순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예술의 분위기에 젖었다. 그림과 공예에 차차 눈뜨게 되었다.
형 이명래는 큰 야망을 품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형 따라 1918년, 13세에 이곳 충정로로 들어왔다. 이곳은 공세리 성당과 외형도 비슷한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어 종교적 환경은 공세리와 비슷했다. 아니 서소문 밖 처형장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순교자들이 배출된 곳이 아닌가.
내포 천주교 역사의 뿌리를 이루는 공세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형의 사업을 돕는다. 눈 코 뜰새 없는 충정로 명래 한의원에서 일을 하면서도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다. 속으로는 형과 다른 길을 꿈 꾸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1925년 이순석은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한 김관식과 김찬영이 졸업한 학교다. 그는 졸업 후 서울에 돌아와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너편 장곡천정(소공동)105번지에 경성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장소, 구인회와 목일회 멤버들의 단골집인 낙랑파라(樂浪parlour)를 개업한다. 그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들이 모여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가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좋은 데생도 알맞게 놓여 실내 실외가 조화롭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파라’다."(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10월) 그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들이 모여 고전음악을 들으며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아지트였다. 1층은 다방, 2층은 개인 작업실로 꾸몄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내부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1930년대 서울의 모던한 스타일이 외국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파라 뒤에는 화가 구본웅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이 있어서 이순석과 구본웅, 구본웅의 절친 시인 이상이 자주 어울렸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등장하는 낙랑파라의 단골손님이 우리나라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하고도 헤어진 뒤에 이곳 출입이 잦았다. 이곳의 지배인은 변동욱이다. 이상은 변동욱에게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둘의 만남은 가히 변강쇠와 옹녀의 만남처럼 우리나라 문예사에서 큰 지진과도 같았다.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변동림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상은 변동림에게 ‘너 나랑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하며 청혼하였고 몇 개월 뒤 정릉골짜기 흥천사에서 결혼했다.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말이 통하는 모던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만하다.
이순석이 일본으로 유학할 때 필요한 돈과 큼지막한 다방 낙랑파라를 개업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고약 판 돈 때문이 아니었을까? 형이 고약을 판 돈으로 동생의 유학길을 놓아주었고, 마침내 서울 한 복판에 큼지막한 다방을 개업한 것이다. 이순석은 다방을 유명 배우 김연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충정로에서 형의 사업을 도와 준다.
이순석의 활약상은 해방을 맞고 부터이다. 국립종합대학교 내 미술대학안 구상(국대안)에 참여하여 1946년 10월부터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우리나라 도안(디자인)의 선구자로서 그의 미술사적 업적은 대단하다. 한 예로 우리나라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도 그가 도안한 것이요, 입법 행정 사법부의 온갖 심벌마크와 휘장을 디자인한 것도 이순석이다. 그리고 서울 요소 요소 큰 성당에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뿐만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공예디자인 연구소를 만들어 불모지였던 산업디자인 분야를 개척하여 수출품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1977년 여의도에 신축한 국회의사당 정문 안에 있는 해태상도 이순석선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당시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선생님은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당에도 해태상을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해태상 예산 3000만원은 해태를 회사의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조를 받았다. 이 돈으로 이순석이 국회의사당 앞 2개의 해태상을 완성했다. 그런데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해태 기단공사를 거의 마칠 무렵 해태제과 박 사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 백포도주를 가져와 두 개의 해태상 기단 아래에 묻었다. 각각 36병씩 72병을 묻었다. 이것을 국회의사당 준공 후 100년 뒤인 2075년에 마시기로 한 것이다. 2075년이면 앞으로 51년 후이다.
지금은 국회가 국민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가? 앞으로 51년 후면 우리의 정치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묻혀 있으니 정치에도 상서로운 바람이 불 것을 기대해 본다.
이명래와 이순석, 두 형제는 우리나라의 의약과 예술분야에서 잊혀질 수 없는 분들이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이다. 우리도 먹고 입고 사는 차원에서 한 차원 높여 이런 선배들의 노력과 스토리를 알고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래 한의원이 외형을 잃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 그러나 언제 이 건물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음식점으로 변한 이 건물에 가서 이명래 선생이 만든 고약도 생각해보고 이순석 선생의 업적도 기릴 일이다.
이제 이명래(1890~1952)선생의 동생 이순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1905-1986)은 이명래의 막내 동생으로 큰 형인 이명래와는 15살 차이가 난다. 큰형과 사이에 7명의 형과 누나가 있었다. 9남매라니? 비혼 주의자가 넘쳐나는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4남매, 5남매만 있어도 TV에 소개되는 시대다.
생각해 보니 우리 어머니도 10남매 중 셋째였다. 전에는 다 그렇게 많이 낳아 키웠다. 아이를 낳고 그 다음날 밭 매러 나가던 시절이다. 이순석의 본명은 평래(平來)인데 아명인 ‘순돌’, 한문 ‘順石’으로 호적에 올렸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던 아이에게 걸 맞는 이름이다.
맏형이 신부의 도움으로 종기와 부스럼 치료제의 제조법을 전수받았다면 막내 순석은 신부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선다. 어릴 적부터 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고, 그림에 재주가 많은 순석을 눈여겨 보던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그림을 직접 지도했다.
성화에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직접 그림을 지도하고 스케치와 유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동생은 형만큼이나 영리했다. 형이 의젓하게 드비즈 신부의 제약 비법을 전수 받았다면, 순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예술의 분위기에 젖었다. 그림과 공예에 차차 눈뜨게 되었다.
형 이명래는 큰 야망을 품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형 따라 1918년, 13세에 이곳 충정로로 들어왔다. 이곳은 공세리 성당과 외형도 비슷한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어 종교적 환경은 공세리와 비슷했다. 아니 서소문 밖 처형장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순교자들이 배출된 곳이 아닌가.
내포 천주교 역사의 뿌리를 이루는 공세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형의 사업을 돕는다. 눈 코 뜰새 없는 충정로 명래 한의원에서 일을 하면서도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다. 속으로는 형과 다른 길을 꿈 꾸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1925년 이순석은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한 김관식과 김찬영이 졸업한 학교다. 그는 졸업 후 서울에 돌아와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너편 장곡천정(소공동)105번지에 경성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장소, 구인회와 목일회 멤버들의 단골집인 낙랑파라(樂浪parlour)를 개업한다. 그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들이 모여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가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좋은 데생도 알맞게 놓여 실내 실외가 조화롭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파라’다."(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10월) 그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예술인들이 모여 고전음악을 들으며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아지트였다. 1층은 다방, 2층은 개인 작업실로 꾸몄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내부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1930년대 서울의 모던한 스타일이 외국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파라 뒤에는 화가 구본웅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이 있어서 이순석과 구본웅, 구본웅의 절친 시인 이상이 자주 어울렸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등장하는 낙랑파라의 단골손님이 우리나라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하고도 헤어진 뒤에 이곳 출입이 잦았다. 이곳의 지배인은 변동욱이다. 이상은 변동욱에게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둘의 만남은 가히 변강쇠와 옹녀의 만남처럼 우리나라 문예사에서 큰 지진과도 같았다.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변동림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상은 변동림에게 ‘너 나랑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하며 청혼하였고 몇 개월 뒤 정릉골짜기 흥천사에서 결혼했다.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말이 통하는 모던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만하다.
이순석이 일본으로 유학할 때 필요한 돈과 큼지막한 다방 낙랑파라를 개업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고약 판 돈 때문이 아니었을까? 형이 고약을 판 돈으로 동생의 유학길을 놓아주었고, 마침내 서울 한 복판에 큼지막한 다방을 개업한 것이다. 이순석은 다방을 유명 배우 김연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충정로에서 형의 사업을 도와 준다.
이순석의 활약상은 해방을 맞고 부터이다. 국립종합대학교 내 미술대학안 구상(국대안)에 참여하여 1946년 10월부터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우리나라 도안(디자인)의 선구자로서 그의 미술사적 업적은 대단하다. 한 예로 우리나라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도 그가 도안한 것이요, 입법 행정 사법부의 온갖 심벌마크와 휘장을 디자인한 것도 이순석이다. 그리고 서울 요소 요소 큰 성당에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뿐만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공예디자인 연구소를 만들어 불모지였던 산업디자인 분야를 개척하여 수출품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1977년 여의도에 신축한 국회의사당 정문 안에 있는 해태상도 이순석선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당시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선생님은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당에도 해태상을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해태상 예산 3000만원은 해태를 회사의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조를 받았다. 이 돈으로 이순석이 국회의사당 앞 2개의 해태상을 완성했다. 그런데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해태 기단공사를 거의 마칠 무렵 해태제과 박 사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 백포도주를 가져와 두 개의 해태상 기단 아래에 묻었다. 각각 36병씩 72병을 묻었다. 이것을 국회의사당 준공 후 100년 뒤인 2075년에 마시기로 한 것이다. 2075년이면 앞으로 51년 후이다.
지금은 국회가 국민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가? 앞으로 51년 후면 우리의 정치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묻혀 있으니 정치에도 상서로운 바람이 불 것을 기대해 본다.
이명래와 이순석, 두 형제는 우리나라의 의약과 예술분야에서 잊혀질 수 없는 분들이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이다. 우리도 먹고 입고 사는 차원에서 한 차원 높여 이런 선배들의 노력과 스토리를 알고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래 한의원이 외형을 잃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 그러나 언제 이 건물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음식점으로 변한 이 건물에 가서 이명래 선생이 만든 고약도 생각해보고 이순석 선생의 업적도 기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