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녀는 부부인가, 부부인 척 역할놀이를 한 것인가 -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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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 1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민예은 작가의 ‘뭉쳐지지 않는 덩어리’ 전에서 본 작품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언뜻 보기엔 똑같은 오브제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라, 이것 참 재미있네' 싶다. 마치 어릴 때 많이 했던 ‘다른 그림 찾기’처럼 두 오브제는 자잘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테두리의 금박, 색상의 차이, 한 줄 더 들어가 있는 문구, 접시의 뒷면…. 궁금했다. 이 두 오브제는 관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걸까?민예은 작가는 굉장한 사고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개별성과 독자성에 대한 명쾌함이 내재되어 있고 언어와 언어로 표현되는 것 (혹은 표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가 녹아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늘 새롭고 흥미롭다. 그런 작가이기에 이렇듯 두 개의 서로 닮은 (그러나 결코 같지 않은) 오브제가 병렬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를 담았다는 것이며 특별함이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다. 뭘까. 오른쪽에 있는 것은 작가가 태어났을 때 이미 집에 있던 접시다.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 온 접시인 셈이다. 귀여운 캐릭터, 밝은 색감, 금빛 테두리…. 유럽 어느 가정집 식기장에 있을 법한 호감이 가는 접시다. 당연히 작가는 그 접시와 친숙했을 것이다. 매일 그 접시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늘 집 어딘가에 있는, 자신이 자란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해 온 접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프랑스의 어느 벼룩시장에서 작가는 집에 있는 그 접시와 똑같은(이라고 생각한) 접시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그 접시를 구매하고 집에 있는 접시와 나란히 놓고 보니, 어라, 다른 접시네!
민예은 작가는 그렇게,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시간성과 장소성, 태생마저 완전히 다른 두 오브제를 병치함으로써 보편성과 개별성에 대한 관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 2
영국 작가인 남자는 자신의 소설 <기막힌 복제품>이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자 강연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다. 강연장에서 만난 여자는 그의 팬이라며 돌아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마을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한다.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술에 대해, 작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의 관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려고 들른 카페의 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착각한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부부인 듯 아닌 듯, 역할 놀이를 하는 듯 진실인 듯 교묘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알리는 마을 종탑의 종소리와 아무런 단서나 힌트를 주지 않은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두 사람은 서로와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 실제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는 지에 대한 숱한 질문을 남기고야 만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Certified Copy)의 내용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마주친 순간부터 끊임없이 오리지널과 카피, 진품과 가짜에 대한 이야기를 변주해 낸다. 작가의 책 제목부터가 <기막힌 복제품>이 아니던가.
두 사람이 함께 본 다비드상 또한 그런 논란의 한 자락이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보던 조각상. 어린 아들은 그 조각을 보고 경외심을 느끼지만 그 조각상은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에게 굳이 모조품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각상이 진품인지 아닌지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 조각상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들의 경외심은 사라지는 것일까?
카페를 나오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상당히 모호해 지는데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선 것처럼)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실제로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상당히 궁금해지게 만든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진짜 부부인가 단순히 부부인 척 역할 놀이를 하는 가짜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은 부부인 척 하면서 남모를 고충과 고민을 서로에게 털어 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부부라고 하기에는 영화 속에 거울과 유리 등 반사체가 너무나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카페의 유리창, 화장실의 거울, 오토바이 옆에 놓여 있던 (눈치 채기 쉽지는 않은) 대형 거울…. 영화 속에서 거울이나 유리는 이미지를 투영하면서 실체나 본체가 아닌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이런 식으로 장치를 한 것은 분명 감독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 영화에서 유리나 거울은 프레임을 나눠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안에서도 전시장이나 카페를 들고 날 때도 유리창이나 유리문이 남자와 여자를 다른 프레임에 나눠 버리는데 결국 이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 (혹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가 엿보이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어쩌면 오리지널리티와 카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체리향기'로 이어지는 그의 영화는 영화가 주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의 영화 속 배우들은 현장에서 섭외한 비전문배우들이 많다. 그런 장치는 영화의 내용이 실제 이야기와 허구를 넘나들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극영화와 다큐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게끔 만든다.
결국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우리 인생의 복제품이라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모호하게 만드는 순간 어쩌면 진실과 거짓의 나눔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라는 껍데기에 담긴 내용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리티는 의미가 있고 원작의 독창성은 존중받아야 하며 그것이 가지는 아우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니, 간과할 수 없다.결국 진짜, 오리지널은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새삼 인정하게 된다. 그 고유성은 그것 스스로의 정체성이며 스스로의 오롯한 시간을 내포하고 있기에 그 의미를 쉽게 지워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비슷해 보이고 아무리 같아 보여도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본질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