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인생, 김부조
[한시공방(漢詩工房)] 인생, 김부조
[원시]
인생

김부조

강물이
흘러가듯이

나무들이
춤추듯이

그리고
새들이
노래하듯이

[태헌의 한역]

人生(인생)

恰如江水流過(흡여강수류과)
恰如樹木婆娑(흡여수목파사)
恰如禽鳥囀歌(흡여금조전가)

[주석]

* 人生(인생) : 인생.
* 恰如(흡여) : 흡사 ~과 같다, 바로 ~과 같다. / 江水(강수) : 강물. / 流過(유과) : 흐르다, 흘러가다.
* 樹木(수목) : 나무, 수목. / 婆娑(파사) : 너울너울 춤추다, 춤추는 모양, <옷자락 등이> 나부끼는 모양.
* 禽鳥(금조) : 새, 날짐승의 총칭(總稱). / 囀歌(전가) : <새가> 지저귀며 노래하다.

[한역의 직역]
인생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이
마치 나무들이 춤추듯이
마치 새들이 노래하듯이

[한역노트]
시를 본격적으로 얘기하기에 앞서 언제부턴가 역자가 꼭 하고 싶었던 군소리를 앞부분에서 두서없이 언급할 예정이라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애송시가 다르고, 좋아하는 시인이 다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의 다 그러하다. 시로 한정시켜 논할 경우, 내가 편안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고, 내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가 있다면 그것이 좋은 시일 것이다. 김부조 시인의 이 시가 역자에게 따스함을 주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니, 역자에게는 좋은 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시에 내가 부여한 모종의 ‘의미’가 시인 본래의 뜻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시인이 어떤 시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는 작자의 영역이고, 내가 그 시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해설이나 조언이 없다면, 결국 독자는 시를 감상하며 자기의 생각을 말하거나 적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 가운데 한 명인 역자가 쓰는 이 글 역시 이 시에 대한 해설이라기보다는 역자의 단상들을 적어놓은 감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시의 키워드는 강물과 나무와 새,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동작 세 가지는 흐른다는 것과 춤춘다는 것과 노래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로 복잡다단한 우리의 인생을 어찌 다 개괄할 수 있을까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 세 가지로도 인생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고, 또 굳이 인생 모든 것을 시 하나로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가령 세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기가 부족한 것이라고 한다면, 서른 가지면 또 넉넉한 것이 될까? 장담하건대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인생을 구름에 비유하든 바람에 비유하든 그것은 시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시인이 철학자가 아니라고 하여 철학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더군다나 비유는 이 세상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 시인이 어떤 의미로 비유를 구사했는가는 시인 본인에게 물어보는 외에는 정확하게 알아낼 길이 사실상 없다. 더욱이 간결한 시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를 위해 남겨둔 생각의 여백이 마당만큼이나 넓으니, 독자가 채워야 할 말이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시 얘기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과 유전(流轉)하는 인생사는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물이 종착지인 바다를 목표로 하는 것과는 달리, 인생사는 종착지인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저 흘러가는 것만이 목표인 것도 아니다. 요컨대 인생은 최종적으로 어디에 닿느냐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방점이 찍힌다고 할 수 있다. 강물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런 강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돌아갈 줄도 알지만, 때로 치고 나가기도 한다. 강물에게는 이것이 순리(順理)이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곧 지혜이므로, 우리는 흘러가는 강물에서 순리와 함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다른 존재를 이롭게 한다는 물의 속성이 당연히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강물이 흘러가듯이” 다른 누군가를 이롭게 하면서 지혜롭게 순리를 따르는 인생 여정을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강물과는 달리 옮겨가지 못한다. 태어난 데서 뿌리를 박고 죽을 때까지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나무는, 우리가 타고난 숙명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런데 고요히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흔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바람이다. 그리고 이 바람은 대개 시련에 견주어진다. 바람이 너무 심하면 나무가 꺾어지게 되지만, 보통의 경우는 바람이 그치면 나무는 옛 모습을 찾아 다시 평정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설혹 가지 몇 개와 제법 많은 잎사귀를 잃었더라도 말이다.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바람을, 나를 흔드는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나를 춤추게 하는 존재로도 인식할 수 있다면, 시련은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돌멩이가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디딤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일 경우, 바람이 오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바로 순응(順應)이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만용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바람이 올 때 “나무들이 춤추듯이” 나를 맡길 수 있다면, 인생은 그만큼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다. 마치 춤이 아름답듯이.....

누구는 새가 운다고 하고 누구는 새가 노래한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새가 운다고 하는 경우조차 슬픔을 개재시키는 일은 매우 드문 편이다. 새가 운다는 말을 새가 노래한다는 말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꽃피고 새가 울 때”는 특별한 전제 조건을 내세우지 않아도 꽃 피고 새가 노래하는 좋은 때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는 물결이 거센 험한 강이나 눈 쌓인 높은 산도 자유롭게 날아 지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영원한 동경이 될 수밖에 없다. 동경은 곧 꿈이고, 꿈은 꾸는 자의 몫이다. 그것이 설령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꿈은 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날아다닐 하늘이 없는 새장 속의 새와 다르지 않다. 자유로운 비상(飛翔)에 대한 동경이 없다면, 자유로운 영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비단 역자만의 상상일까? 역자는, 우리가 새의 노래와 비상을 통해 ‘즐겁게’, ‘자유롭게’, 그리고 ‘꿈꾸듯이’라는 부사어를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사어는 우리네 인생에 장착해야 할 멋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역자는 3연 7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3구의 육언시로 한역하였으며, 매구마다 압운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압운자는 ‘過(과)’, ‘娑(사)’, ‘歌(가)’가 된다.

2023. 11. 14.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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