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의 우승…LG 야구와 사업의 공통점 [안재광의 대기만성'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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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LG트윈스
LG 계열사 사업도 야구처럼 체질개선
슈퍼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선수와 육성사업 발굴하고
이긴다는 정신력 심어줘
LG 계열사 사업도 야구처럼 체질개선
슈퍼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선수와 육성사업 발굴하고
이긴다는 정신력 심어줘
LG 트윈스가 강해진 게 스타 플레이어 몇 명 영입해서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4, 5년 이상 꾸준히 팀을 리빌딩 한 결과라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정규 리그에서 2위를 할 정도로 최근 전력이 탄탄해 졌잖아요. 야구 전문가들은 당분간 LG가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LG 야구를 보면서 LG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도 비슷하게 굉장히 탄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수층이 두터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한 두 계열사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잘 돌아가게 사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구광모의 LG는 어떻게 야구와 사업의 체질을 바꿨을까요. 우선 LG를 이끌고 있는 구광모 회장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할 것 같아요. 구광모 회장은 LG의 4세 경영자 입니다.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1대, 구자경 회장이 2대, 구본무 회장이 3대였죠. 구본무 회장 뒤를 잇긴 했지만요,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LG그룹은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해서 3대까지는 장자가 회사를 물려 받았고요. 3대인 구본무 회장은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서 승계를 했습니다. 사실 구본무 회장에게도 아들이 있긴 했는데, 굉장히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이외에 딸도 두 분 있긴 한데, 장자 승계가 원칙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두 딸들은 후계 구도에서 빠졌습니다.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승계 구조인가 생각이 들 법 합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들에게 꼭 물려줘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LG가 4대 까지 내려오는 동안 경영권 분쟁을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런 원칙이 없었다면 분쟁이 생겼을 개연성이 큽니다. 장자가 아니어도 형제라면 누군들 LG 경영권에 욕심이 없었겠어요.
구광모 회장이 2018년에 회장에 올랐을 때 말들이 엄청 많았어요. 양자에다가 나이는 당시 만으로 마흔살이라 굉장히 젊었죠. 구광모 회장이 1978년생인데요, 열 살이나 많은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도 당시 부회장이었고요. 1970년생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당시에는 부회장이었거든요. 또 경영권 분쟁은 아니지만, 재산 분쟁이 있습니다. 구광모 회장이 승계를 받으려면 구본무 회장의 지분이 필요했는데요.구본무 회장이 보유하고 있었던 지분 11.28% 가운데, 8.76%를 받았고요. 나머지 약 2.5%가 두 딸인 구연경, 구연수 씨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구본무 회장의 미망인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이 이러한 재산 분할에 반발해서 현재 소송을 벌이고 있죠. 조카에게 LG란 큰 회사를 물려주다 보니 부인과 딸들은 속이 상할 것도 같긴 합니다. 이런 여러 사정 탓에 구광모 회장 입지가 그룹 내에서 굉장히 강하다, 이렇게 말하기가 힘든데요.이걸 돌파할 방법이 있습니다. 구광모의 LG는 예전과 다르다, 너무 잘한다, 이걸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야구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구본무 회장 때인 1990년 LG에 구단이 생긴 뒤에 첫 해 바로 우승을 했고요. 그리고 4년 뒤인 1994년 두 번 우승을 했죠. 또 1997년, 1998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 합니다.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굉장히 잘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근데, 아깝게 계속 우승을 못하니까 LG 야구가 이상해 지기 시작합니다. 정점이 2002년 준우승을 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김성근 감독 때였는데요. 준우승을 하긴 했지만, LG가 추구하는 공격 야구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죠. 이후에도 LG 야구는 성적에 집착하게 되고, 팀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보다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식으로 대증요법을 씁니다.
그러다가 LG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정말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에 나서는데요. 특히 선수 육성에 엄청난 공을 들입니다. 2군 경기장 시설을 리그 최고 수준으로 바꿔주고, 좋은 코치들도 붙여줘서 잘 하겠다는 의지가 큰 선수에 투자를 팍팍 해주죠. 결정적으로 2군 리그에서 잘 하면, 1군으로 바로 바로 올려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도 줍니다. 반대로 1군에서 못하면 바로 짐 싸서 2군으로 가야 하고요. 1군이든 2군이든 무한 경쟁을 시켜서 다 열심히 하게 시스템을 고쳤어요.
이게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1군도 나름 기득권 같은 것이어서 2군과 왔다 갔다 하는 게 구단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잘 안 되거든요. 근데 LG는 이걸 밀어 붙였어요. 그렇게 해서 2군 출신 스타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죠. 출루왕 홍창기, 2년 연속 3할을 때려낸 문보경, 작은 키에도 거포로 성장 중인 문성주 같은 타자들이 대표적입니다. 투수 중에서도 김윤식, 정우영, 이정용 같은 선수들이 2군에서 올라와 좋은 성과를 냈죠. LG가 올 시즌 내내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렇게 1,2군 선수층이 두터워서 누가 좀 부진하면, 곧바로 대체할 선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LG는 팀 하나 더 만들어도 될 정도로 선수층이 두텁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LG 사업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멀리 보고 육성 선수, 아니 육성 사업을 키우고 있습니다. 예컨대 LG전자는 당장 매출이 많이 나왔던 휴대폰 사업을 접고 자동차 부품 사업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어요. 자동차 부품은 매년 대규모 적자를 냈는데,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고요. 올해는 이익률이 더 올라가서 캐시카우 역할까지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구광모 회장이 취임한 해인 2018년 오스트리아 헤드램프 업체 ZKW를 1조원 넘게 주고 인수했고, 2021년에는 캐나다 부품 기업 마그나와 전기차 구동체계 시장까지 진출했는데 이 사업들이 하나둘 터지고 있어요. 마그나 합작법인은 설립 2년 만에 분기 첫 흑자를 냈고, ZKW도 최근 볼보, 폴스타 같은 전기차의 헤드램프로 채택 됐습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올해 연간 LG전자의 전기차 부품, 이걸 VS 사업부라고 하는데요. 이 부문 매출이 처음 10조원을 넘기고, 영업이익도 2000억원 이상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LG전자는 TV, 세탁기, 청소기 같은 가전 회사로 아는데요, 앞으로는 주력이 전기차 부품이 될 수도 있겠어요.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우승을 가져오지 못 한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비슷해 보입니다. LG는 과거 올타임 레전드 박영택, 이병규 같은 슈퍼스타가 있었지만 우승은 못했어요. 지금은 이런 레전드 슈퍼스타가 없어도 더 강팀으로 분류됩니다. 특히 투수진의 경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NC의 에릭 페디나 kt의 쿠에바스, 고영표 같은 중량급 있는 선발이 없는데도 굉장히 강력해요. 이정용, 정우영, 김진성, 함덕주, 고우석 같은 불펜진이 언제든 나올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슈퍼스타 전략의 포기가 사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예컨대 LG는 전기차 시대에 가장 강력한 잠재 후보죠. 가장 중요한 전기차 부품 사업을 거의 다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테슬라와 원펀치 선발 싸움 해선 못 이긴다고 판단하고 벌떼 전략으로 가고 있습니다.
전기차 배터리,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구동 체계, 조명 장치, 카메라 모듈, 디스플레이 같은 불펜진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타나서 테슬라든, GM이든, 폭스바겐이든 상대하면 되니까요.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애플의 아이폰 처럼 강력한 원 펀치 전략은 접고, 카메라 모듈, 디스플레이 같은 부품 벌떼 전략으로 영리하게 공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기겠다는 정신력입니다. LG 트윈스의 암흑기였던 2010년대 LG는 우승은 고사하고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기회를 놓치는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요. 이건 실력을 떠나서 요즘 말로 '그릿'이라고 하죠, 근성을 아예 잃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르죠. 당장 한국시리즈 2차전만 해도 4대 0으로 지고 있다가 차근차근 점수를 내서 4대 5로 역전을 했잖아요. 특히 LG 선수 중에 가장 논란이 큰 김현수가 큰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LG가 100억원 넘게 주고 영입했는데, 그만큼 성적을 내고 있느냐 하면서 욕을 먹기도 하지만요. 김현수는 중요한 고비 때마다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해서 이기는 야구를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LG의 계열사들도 이기겠다는 정신력이 이전보다 훨씬 세진 것 같아요. 사실 구본무 회장 시절 LG의 경영이념은 인화였죠. 잘 어울리고 화합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죽는 전쟁터 같은 시장에서 유효한 말인가 싶은데요. 어쨌든 LG는 삼성이나 SK 같은 다른 대기업에 비해 치열함이 덜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구광모 회장의 LG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상징적인 사건이 SK와 배터리 기술을 놓고 싸운 것인데요.
SK가 LG 출신 직원들을 대거 영입하자, 이게 기술 침해에 해당한다고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이 때 LG의 발언 수위가 굉장히 셌어요. "SK가 배터리 사업 아예 못하게 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미국 백악관이 나서서 중재를 요청할 정도로 꽤 큰 사건이었어요. 결론은 2조원을 받고 끝내는 것으로 났습니다.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떼어내서 상장을 시킨 것도 논란은 좀 있었지만 같은 맥락 같습니다. LG화학의 소액주주 입장에선 알짜 사업을 떼어낸 것이라 엄청나게 반발했는데, 이걸 무릎쓰고 2022년 초에 상장을 강행했죠. 결과적으로 LG는 시가총액 10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에 이은 국내 증시 2등 기업을 갖게 됐습니다. LG는 상장을 해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이 돈으로 공장 팍팍 늘려서 1등 되겠다는 의지가 엄청납니다. LG처럼 팬층이 많은 곳도 없죠. LG 트윈스의 경우 서울이 연고란 점도 있지만, 전 프로야구 구단 가운데 가장 관객수가 많은 팀입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팀이 우승을 계속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는데요. LG 그룹도 비슷합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대기업에 상당히 부정적인데 반해, LG는 유독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나 SK 같은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 사업이 없어서, 혹은 현대차 처럼 존재감 있는 제품이 없어서 만년 2등 같은 느낌입니다. 야구도 사업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줄 지 궁금합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