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와 보온력, 그리고 품격...라면 그릇이 갖춰야할 몇가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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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이문열은 소설<변경>에서 1960년대 라면의 맛을 이렇게 서술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는 음식”.
문인들의 라면 예찬은 또 있다. 소설가 김훈은 2015년 발간한 산문집의 제목을 아예 <라면을 끓이며>로 짓고 자신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했다. 그리고 라면은 단순히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어린 시절 미군에게 얻어먹던 씨레이션과 초콜릿처럼 유년의 기억을 부르는 음식이라고 했다. 세계라면협회(WINA, 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 집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라면 소비량은 연평균 38억~39억 개 정도였으나 코로나19 발생 이후에는 ‘집콕’ 수요가 늘면서 41억3000만개로 증가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밀키트와 배달 음식 등 대체 음식이 성장하면서 2021년 이후 라면 소비가 37억9000만 개로 감소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각별한 라면 사랑이 결코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중에 자기만의 라면 조리법, 취향 없는 자가 어디 있으랴.
한국에서 처음 라면이 나온 건 1963년이다. 라면은 중국이 원조다. 라면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요리의 현대화를 내세워 소비를 장려하며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 라면은 면 요리 원조인 중국이나, 다양한 베이스의 국물과 면의 조합으로 라면을 요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본과도 다르다.
한국 라면은 명실상부 남녀노소 부귀빈천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자 문화다. 최근에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한국 라면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인들이 접하고 소비하는 명실상부한 ‘K-푸드’의 대표주자이자 수출 효자품목이 되었다. 라면이 이처럼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울 푸드’로 자리 잡은 것은 조리법이 빠르고 간편하며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냄비에 물을 잘박잘박하게 넣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면을 끓는 물에 넣은 후, 스프와 토핑을 추가해 3-4분을 더 끓여 익힌다. 기호에 따라 고춧가루, 청양고추 등을 첨가하거나 계란, 송송 썬 파를 추가로 넣어 익히면, 아직 채 면이 익지 않았음을 알지만 입안에 침이 저절로 고이고 눈빛이 흔들린다.
바빠서 시간이 부족한 날이나 급한 배고픔을 해결해야 할 때, 라면보다 완벽하고 적절하며 빠른 선택은 없다. 아무리 거하게 삼겹살을 굽고 쌈된장과 함께 상추에 크게 한입 싸서 아래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려 먹어도, 더 이상 뱃속에 자리 없이 양껏 먹었음에도 한국인은 느끼하고 비리고 들척지근한 고기 기름의 흔적을 지우고자, 입안을 개운하게 하려는 이유를 내세워 마지막에는 입가심용 라면을 끊인다.
어떤 한국인이 잘 익어서 사각거리는 배추김치와 적당히 꼬들꼬들하게 익어 국물을 탄력 좋게 튕겨 내는 면발의 어울림을 거부할 수 있으랴. 여기에 치즈나 불고기 등 생경한 재료를 더 넣어 뚱뚱하게 만 신형 김밥은 아니어도, 그저 단무지, 시금치, 우엉, 달걀 등으로만 단출하게 속을 넣은 기본 김밥을 적당히 기름지고 뜨거운 라면 국물을 번갈아 가며 먹는다면, 한 끼의 위로, 호사스러움이 고급 식당에서 한상차림을 먹는 것과 견준다 한들 부족하다 할 수 있을까? 라면은 모름지기 좋은 옷 입고 사교를 겸해 먹는 음식은 아니라고 한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기존 라면에 해산물이나 육류를 더해 고급화된 신형라면을 메뉴로 선보이기도 하고, 중국 마라탕(麻辣湯) 재료를 더해 퓨전 라면을 파는 곳도 있다.
하지만 다시 내가 찾는 맛은 변형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석 그대로 끓인 레시피다. 라면의 정도를 벗어난 맛은 나의 목구멍도 정서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라면 면발을 입으로 호호 불고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길 수 회 거듭한다. 적당히 식은 촉촉한 면발을 흡입할 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 나아가 그릇에 입술을 대고 조금씩 뭉근하고 자극적인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흐르는 전율을 온전히 느끼려면, 퓨전 혹은 고급은 빈약한 신기루다.
라면을 두고 아직도 빈자의 결핍이나 쓸쓸한 혼밥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까? 라면은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조리하고 뚜껑을 뒤집어 먹어야 제맛이라는 사람도 많다. 아마도 재료 본연의 맛에 추억을 양념으로 더해 먹으려는 속뜻일 거다. 그러나 라면은 이미 추억으로만, 궁상맞음으로만 즐기는 음식을 넘어섰다. 라면의 맛은 이미 혓바닥이 아닌 우리 정서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라면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편안함과 마음 깊은 허기진 곳을 쓰다듬는 음식이라면, 공예가들이 만든 사물 역시 사람에게 행하는 태생의 본연과 역할이 같다. 나는 10월 북촌 한옥촌 ‘행복작당2023’에 방문했다가, 월(WOL)삼청에서 오뚜기가 서울대 도예과와 함께 개발한 면기 전시 ‘오뚜기잇2023’ 을 보았다. 오뚜기의 상징색인 노란색을 중심으로 식품을 지칭하는 ‘eat(잇)’과 식사 도구를 뜻하는 ‘it(잇)’을 ‘잇는다는 의미를 합친 행사’다.
23명의 프로젝트팀이 참여해 6개월간 개발한 면기와 테이블웨어 등을 만들었다. 전시를 보면서 ‘나는 어떤 그릇에 라면을 담아 먹어볼까? 어떤 그릇이 양은 냄비를 대체해 색다른 추억과 식(食)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라면 그릇은 아름다움도 있어야 하지만, 라면 그릇으로 충족시켜야 할 기능이 있다.
면의 종류와 조리법에 따라 다르지만, 550ml(3컵) 전후 물을 넣어 끓인다. 여타 식재료를 더하면 용량은 조금 더 늘어날 것이다.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것, 국물이 면에 스며들되 국물이 면의 맛과 식감을 해치지 않는 것. 빨리 식지 않는 보온력, 나아가 라면을 먹으며 소환가능한 기억과 감정들, 한 그릇의 분식을 먹어도 초라해지지 않을 식사의 품격을 모두 충족한다면 좋은 라면 그릇이 아닐까?
나는 열 효율이 좋아 빨리 끓고 가벼운 양은냄비의 과학을 믿지만, 먹을 때는 나의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그릇을 선택해 옮겨 담는다. 혼자 먹어도 개인 플레이팅 매트를 깔고 좋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낸 후 받침까지 괸다. 곁들일 김치나 무절임도 작은 종지에 먹을 만큼 덜어 둔다.
왕후장상의 밥상은 아니지만 그리고 몇백 원이면 마트에 가서 사고 3~4분이면 후다닥 끓일 공산품이지만 한 끼의 식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처럼, 혼자 먹어도 덜 쓸쓸하게,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대접하는 ‘라면 한 그릇’이다.
문인들의 라면 예찬은 또 있다. 소설가 김훈은 2015년 발간한 산문집의 제목을 아예 <라면을 끓이며>로 짓고 자신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했다. 그리고 라면은 단순히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어린 시절 미군에게 얻어먹던 씨레이션과 초콜릿처럼 유년의 기억을 부르는 음식이라고 했다. 세계라면협회(WINA, 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 집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라면 소비량은 연평균 38억~39억 개 정도였으나 코로나19 발생 이후에는 ‘집콕’ 수요가 늘면서 41억3000만개로 증가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밀키트와 배달 음식 등 대체 음식이 성장하면서 2021년 이후 라면 소비가 37억9000만 개로 감소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각별한 라면 사랑이 결코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중에 자기만의 라면 조리법, 취향 없는 자가 어디 있으랴.
한국에서 처음 라면이 나온 건 1963년이다. 라면은 중국이 원조다. 라면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요리의 현대화를 내세워 소비를 장려하며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 라면은 면 요리 원조인 중국이나, 다양한 베이스의 국물과 면의 조합으로 라면을 요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본과도 다르다.
한국 라면은 명실상부 남녀노소 부귀빈천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자 문화다. 최근에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한국 라면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인들이 접하고 소비하는 명실상부한 ‘K-푸드’의 대표주자이자 수출 효자품목이 되었다. 라면이 이처럼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울 푸드’로 자리 잡은 것은 조리법이 빠르고 간편하며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냄비에 물을 잘박잘박하게 넣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면을 끓는 물에 넣은 후, 스프와 토핑을 추가해 3-4분을 더 끓여 익힌다. 기호에 따라 고춧가루, 청양고추 등을 첨가하거나 계란, 송송 썬 파를 추가로 넣어 익히면, 아직 채 면이 익지 않았음을 알지만 입안에 침이 저절로 고이고 눈빛이 흔들린다.
바빠서 시간이 부족한 날이나 급한 배고픔을 해결해야 할 때, 라면보다 완벽하고 적절하며 빠른 선택은 없다. 아무리 거하게 삼겹살을 굽고 쌈된장과 함께 상추에 크게 한입 싸서 아래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려 먹어도, 더 이상 뱃속에 자리 없이 양껏 먹었음에도 한국인은 느끼하고 비리고 들척지근한 고기 기름의 흔적을 지우고자, 입안을 개운하게 하려는 이유를 내세워 마지막에는 입가심용 라면을 끊인다.
어떤 한국인이 잘 익어서 사각거리는 배추김치와 적당히 꼬들꼬들하게 익어 국물을 탄력 좋게 튕겨 내는 면발의 어울림을 거부할 수 있으랴. 여기에 치즈나 불고기 등 생경한 재료를 더 넣어 뚱뚱하게 만 신형 김밥은 아니어도, 그저 단무지, 시금치, 우엉, 달걀 등으로만 단출하게 속을 넣은 기본 김밥을 적당히 기름지고 뜨거운 라면 국물을 번갈아 가며 먹는다면, 한 끼의 위로, 호사스러움이 고급 식당에서 한상차림을 먹는 것과 견준다 한들 부족하다 할 수 있을까? 라면은 모름지기 좋은 옷 입고 사교를 겸해 먹는 음식은 아니라고 한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기존 라면에 해산물이나 육류를 더해 고급화된 신형라면을 메뉴로 선보이기도 하고, 중국 마라탕(麻辣湯) 재료를 더해 퓨전 라면을 파는 곳도 있다.
하지만 다시 내가 찾는 맛은 변형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석 그대로 끓인 레시피다. 라면의 정도를 벗어난 맛은 나의 목구멍도 정서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라면 면발을 입으로 호호 불고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길 수 회 거듭한다. 적당히 식은 촉촉한 면발을 흡입할 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 나아가 그릇에 입술을 대고 조금씩 뭉근하고 자극적인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흐르는 전율을 온전히 느끼려면, 퓨전 혹은 고급은 빈약한 신기루다.
라면을 두고 아직도 빈자의 결핍이나 쓸쓸한 혼밥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까? 라면은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조리하고 뚜껑을 뒤집어 먹어야 제맛이라는 사람도 많다. 아마도 재료 본연의 맛에 추억을 양념으로 더해 먹으려는 속뜻일 거다. 그러나 라면은 이미 추억으로만, 궁상맞음으로만 즐기는 음식을 넘어섰다. 라면의 맛은 이미 혓바닥이 아닌 우리 정서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라면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편안함과 마음 깊은 허기진 곳을 쓰다듬는 음식이라면, 공예가들이 만든 사물 역시 사람에게 행하는 태생의 본연과 역할이 같다. 나는 10월 북촌 한옥촌 ‘행복작당2023’에 방문했다가, 월(WOL)삼청에서 오뚜기가 서울대 도예과와 함께 개발한 면기 전시 ‘오뚜기잇2023’ 을 보았다. 오뚜기의 상징색인 노란색을 중심으로 식품을 지칭하는 ‘eat(잇)’과 식사 도구를 뜻하는 ‘it(잇)’을 ‘잇는다는 의미를 합친 행사’다.
23명의 프로젝트팀이 참여해 6개월간 개발한 면기와 테이블웨어 등을 만들었다. 전시를 보면서 ‘나는 어떤 그릇에 라면을 담아 먹어볼까? 어떤 그릇이 양은 냄비를 대체해 색다른 추억과 식(食)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라면 그릇은 아름다움도 있어야 하지만, 라면 그릇으로 충족시켜야 할 기능이 있다.
면의 종류와 조리법에 따라 다르지만, 550ml(3컵) 전후 물을 넣어 끓인다. 여타 식재료를 더하면 용량은 조금 더 늘어날 것이다.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것, 국물이 면에 스며들되 국물이 면의 맛과 식감을 해치지 않는 것. 빨리 식지 않는 보온력, 나아가 라면을 먹으며 소환가능한 기억과 감정들, 한 그릇의 분식을 먹어도 초라해지지 않을 식사의 품격을 모두 충족한다면 좋은 라면 그릇이 아닐까?
나는 열 효율이 좋아 빨리 끓고 가벼운 양은냄비의 과학을 믿지만, 먹을 때는 나의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그릇을 선택해 옮겨 담는다. 혼자 먹어도 개인 플레이팅 매트를 깔고 좋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낸 후 받침까지 괸다. 곁들일 김치나 무절임도 작은 종지에 먹을 만큼 덜어 둔다.
왕후장상의 밥상은 아니지만 그리고 몇백 원이면 마트에 가서 사고 3~4분이면 후다닥 끓일 공산품이지만 한 끼의 식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처럼, 혼자 먹어도 덜 쓸쓸하게,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대접하는 ‘라면 한 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