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동 칼럼] 조희대 후보자가 상기시킨 중도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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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시비 상대모순 가득한 세상
양극단 버려야 융합 가능한데
편견·집착으로 전쟁·불화 야기
조 후보자, 이념보다 법리에 충실
보수성향이나 보수편 서지 않아
고질적 진영대립 중도로 풀어야
서화동 논설위원
양극단 버려야 융합 가능한데
편견·집착으로 전쟁·불화 야기
조 후보자, 이념보다 법리에 충실
보수성향이나 보수편 서지 않아
고질적 진영대립 중도로 풀어야
서화동 논설위원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1912~1993)은 불교의 주요 교리와 사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해인총림(해인사) 초대 방장에 추대된 1967년 동안거 때 약 100일에 걸쳐 불교를 총체적으로 강설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이 대표적이다. 유튜브에 공개된 당시의 육성 법문을 보면 꽤 많은 분량이 과학강의를 방불케 한다.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부터 시작해 양자이론, 핵물리학, 생물학, 실험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을 넘나들며 과학으로 불교를 풀어낸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질량=에너지’다. 둘은 상호 변환하면서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래서 세상은 불생불멸이다. 또한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할 땐 전자(음전자)-반전자(양전자)처럼 쌍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땐 쌍으로 없어진다. 이 같은 쌍생성·쌍소멸 현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쌍차쌍조(雙遮雙照)와 닮았다. 쌍차란 양변(양극단)을 버리는 것, 쌍조는 양변이 서로를 비추고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세상은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 수많은 양극단의 상대모순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세계다. 여기서 참다운 평화를 이루려면 모순상극의 양극단을 버리고 융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쌍차와 쌍조며 선악, 시비, 고락의 이분법을 넘어선 중도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양극단에 쏠리기 쉬운 게 인간이다. 종교, 이념, 민족과 인종, 출신 지역, 젠더 등 다양한 이유로 분열, 갈등, 증오가 형성되고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마저 자행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부터 그렇다.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가치나 지식, 기준, 잣대가 세상의 전부인 양 집착하고 재단하는 데서 불화와 비극이 비롯된다.
“한평생 법관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중도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다”는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의 말은 그래서 신선했다. 조 후보자는 자신의 보수 성향을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정해진 법이 없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최상의 법” “우리의 두 눈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본다”고 했다. 양극단에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라는 뜻일 게다. 실제로 그의 판결은 좌우 이념보다 법리에 충실했다는 평이 많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보수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학습지 교사를 근로자로 인정한 판결,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권선택 전 대전시장에 대한 무죄 취지 파기 환송이 대표적이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됐지만 인사청문회에서 5·16은 쿠데타, 유신헌법은 권력분립을 후퇴시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약화시킨 바람직하지 못한 헌법이라고 평가했다.
조 후보자의 중도론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지난 9월 퇴임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질서 파괴 때문이다. 친야 성향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민변 출신의 요직 독점, 야권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 재판 지연과 정치적 중립 훼손, 법원장 후보 추천제로 인한 판사들의 도덕적 해이 등 김명수 사법부의 폐해는 손으로 꼽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엄정함, 저울은 형평성, 안대는 중립성을 의미한다. 안대를 벗어던진 편견의 눈에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중도의 가치를 절감해야 할 사람들은 사법부만이 아니다. 이른바 ‘개딸’들의 겁 없는 ‘수박 테러’,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어린 놈” 발언, 거대 야당의 끝없는 입법 폭주와 방탄 국회, 총선을 앞둔 여당의 혁신 갈등 등이 모두 자기만의 이익과 고집, 즉 양극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고질적 진영논리와 대립도 마찬가지다. 중도는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중간은 아니다. 기계적·산술적 균형이 아니라는 얘기다.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가 대립할 때 육식·채식을 절반씩 한다고 화합이 되는 건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싸운다고 두 종교를 절반씩 믿으라고 할 수 있겠나. 상호모순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융합과 평화의 길을 찾게 된다. 조 후보자가 일깨운 중도의 가치를 모두가 곱씹어봤으면 좋겠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질량=에너지’다. 둘은 상호 변환하면서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래서 세상은 불생불멸이다. 또한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환할 땐 전자(음전자)-반전자(양전자)처럼 쌍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땐 쌍으로 없어진다. 이 같은 쌍생성·쌍소멸 현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쌍차쌍조(雙遮雙照)와 닮았다. 쌍차란 양변(양극단)을 버리는 것, 쌍조는 양변이 서로를 비추고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세상은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 수많은 양극단의 상대모순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세계다. 여기서 참다운 평화를 이루려면 모순상극의 양극단을 버리고 융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쌍차와 쌍조며 선악, 시비, 고락의 이분법을 넘어선 중도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양극단에 쏠리기 쉬운 게 인간이다. 종교, 이념, 민족과 인종, 출신 지역, 젠더 등 다양한 이유로 분열, 갈등, 증오가 형성되고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마저 자행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부터 그렇다.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가치나 지식, 기준, 잣대가 세상의 전부인 양 집착하고 재단하는 데서 불화와 비극이 비롯된다.
“한평생 법관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중도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다”는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의 말은 그래서 신선했다. 조 후보자는 자신의 보수 성향을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정해진 법이 없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 최상의 법” “우리의 두 눈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본다”고 했다. 양극단에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라는 뜻일 게다. 실제로 그의 판결은 좌우 이념보다 법리에 충실했다는 평이 많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보수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학습지 교사를 근로자로 인정한 판결,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권선택 전 대전시장에 대한 무죄 취지 파기 환송이 대표적이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됐지만 인사청문회에서 5·16은 쿠데타, 유신헌법은 권력분립을 후퇴시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약화시킨 바람직하지 못한 헌법이라고 평가했다.
조 후보자의 중도론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지난 9월 퇴임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질서 파괴 때문이다. 친야 성향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민변 출신의 요직 독점, 야권 인사들에 대한 노골적 재판 지연과 정치적 중립 훼손, 법원장 후보 추천제로 인한 판사들의 도덕적 해이 등 김명수 사법부의 폐해는 손으로 꼽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엄정함, 저울은 형평성, 안대는 중립성을 의미한다. 안대를 벗어던진 편견의 눈에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중도의 가치를 절감해야 할 사람들은 사법부만이 아니다. 이른바 ‘개딸’들의 겁 없는 ‘수박 테러’,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대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어린 놈” 발언, 거대 야당의 끝없는 입법 폭주와 방탄 국회, 총선을 앞둔 여당의 혁신 갈등 등이 모두 자기만의 이익과 고집, 즉 양극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고질적 진영논리와 대립도 마찬가지다. 중도는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중간은 아니다. 기계적·산술적 균형이 아니라는 얘기다.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가 대립할 때 육식·채식을 절반씩 한다고 화합이 되는 건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싸운다고 두 종교를 절반씩 믿으라고 할 수 있겠나. 상호모순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융합과 평화의 길을 찾게 된다. 조 후보자가 일깨운 중도의 가치를 모두가 곱씹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