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은 100년 빈티지 와인같다, 모든 순간 새로 피어나니까
와인 한 병이 든 종이봉투를 손으로 꽉 움켜쥔 채 멀리서 걸어오는 김선욱이 보였다. 2014년 협연자(피아니스트)로 유럽 순회공연 중 일 때였는데,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그다웠고 멋스러웠다.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잠시 짧은 대화가 오갔다. 나중에 듣기로는 김선욱은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장인(匠人)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은 취향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래서 그 때 와인을 들고 나타난 게 아닌가 싶었다.

그 투어의 공연은 말할 것도 없이 환상적이었다. 연주 스타일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니 좋을 수밖에 없다. 10대 때부터 봐왔는데 변화하는 모습을 늘 속으로 응원하고 있는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 김선욱은 지금은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때부터 그가 내는 음색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의 지휘자로서 어떤 여정을 밟게 될지도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김선욱은 3살에 피아노를 시작해 10살에 독주회, 12살에 협연 데뷔 무대를 가졌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과와 영국 왕립음악원 지휘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아시아 연주자로서는 처음인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2006년)우승 외에 독일 에틀링겐 국제 피아노 콩쿠르(2004), 스위스 클라라 하스킬 국제 피아노 콩쿠르(2005)에서 우승한 그는 2013년 독일 본에 위치한 베토벤 생가 베토벤 하우스 멘토링 프로그램 첫 수혜자로 선정되어 베토벤 하우스 소장품을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김선욱은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사라 장(장영주)을 보고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장한나 때문에 첼로도 배웠다고 한다. 결국 피아노로 돌아왔지만, 다시 영국의 왕립음악원(RAM)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현대 사회는 영역을 불문하고 제너럴리스트보다 스페셜리스트를 더 높이 평가하고, 이는 클래식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안다는 것은 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결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선욱은 그런 시각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에게는 전부터 특정 ‘악기’가 아니라 ‘음악’을 하는 연주자라는 꿈이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참 낭만적이고 실력 있는 괴짜가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하고 싶다고 다 된다면 뭐가 특별할 게 있을까. 남들이 못 하는 걸 해내니 대단한 것이다. 이런 다재다능은 분명 신이 내려준 재능일 것이다.
김선욱은 100년 빈티지 와인같다, 모든 순간 새로 피어나니까
김선욱이 2007년 금호음악인상 수상자가 되면서 촬영할 일이 생겼다. 금호아트홀 무대 위에 파란 배경지를 걸어 놓고 촬영한 이 사진은 당시에 많이도 쓰였다. 당시 그는 18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랬지만 그때도 양반처럼 느긋하게 조용하게 응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건반 위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던, 아니 비상하던 그 손가락은 조명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희고 검은 건반 위를 망설임 없이 날아다니는 그 손가락들은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와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불가사의하다는 인상마저 받을 만큼 화려하고도 힘찬 연주였다.
김선욱은 100년 빈티지 와인같다, 모든 순간 새로 피어나니까
연주 중 잠시 멈추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침묵이 아니라 또 다른 음악이 들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 나는 셔터를 눌렀고 이 사진이 나왔다. 그 당시 굉장히 이끼던 사진이었다.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를 접할 때마다 기분이 참 좋았다.

김선욱이 행동반경을 넓혀서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면서, 한계에 굴하지 않고 부딪쳐 보고 결국 해내고야 마는 그 의지와 변모가 놀랍고 멋있다. 짐작이지만 음악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이렇게 한 게 아닐까 싶다.

한 작곡가의 곡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연주되기 마련이고 팬들도 이에 따라 움직이고 응원한다. 마블 영화의 슈퍼히어로처럼 김선욱은 압도적인 고유의 이미지가 있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독립영화라지만 영화에 출연한 것도 그런 ‘스타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황제'는 시골 어느 한적한 모텔에서 만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로 한 세 사람이 김선욱의 연주에 이끌려 시공을 초월한 환상적인 여정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기도 했고, 나는 예술의전당에 있는 음반 가게에서 김선욱이 사인해 놓은 CD를 구입해 출퇴근 길에 차에서 많이도 들었다.

사진작가로서 여러 위대한 선배 작가들의 작업에 경의를 표하게 될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있다. 20세기 격동의 현장에 선 사진작가로, 그녀가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0~1950년대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대, 많은 혼란과 변화의 시기에 활동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공황과 여러 공산국가의 탄생, 나치즘의 대두, 제2차 세계대전, 각종 종교 분쟁,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세계는 그야말로 혼란과 변화의 도가니였다. 그 격동의 시기에 마거릿 버크화이트는 사진기를 둘러메고 역사의 현장 어디든지 찾아갔다.

나의 사진 작업장에는 마가렛의 사진이 걸려있다. 1935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의 위험한 난간에 올라가 촬영하는 모습을 조수(Oscar Graubner)가 다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한 장을 위해서라면 빌딩 꼭대기도 주저하지 않고 올라가 사진을 찍었고, 격심한 폭격 현장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댔다. 독재자 스탈린의 심각한 표정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간디의 정신세계까지 촬영하고자 노력한 사진에서는 피사체와 최대한 밀착하고자 하는 굳센 신념이 느껴졌다. 마거릿은 한 명의 사진작가로서 피사체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평생에 걸쳐 일관된 것으로 그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였다.

마가렛은 미국 잡지 '포춘'(Fortune)과 '라이프'(Life) 등을 통해 사진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작가가 하나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라는 포토 저널리즘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녀 이후로 사진은 단순히 현장 기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진으로 기사의 관점을 나타내는 ‘저널’의 단계로 뛰어올랐다.

나는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적은 없지만, 이처럼 마가렛이 보여준 생생한 문제의식을 본받아 K-클래식의 역사에 조금이나마 기록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 연주자로서, 또 피사체로서 개인적으로 아끼고 있는 김선욱이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변모하는 과정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적어본다.
김선욱은 100년 빈티지 와인같다, 모든 순간 새로 피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