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가는 게 꿈이었던 늙은 아내에게 '우주 연구원 옷' 지어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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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누구에게든 ‘선택’의 순간은 어렵고 두렵다.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까봐, 이후의 삶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를까봐 무섭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내가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다. 선택의 결과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져 후회와 회한의 삶을 살게 될까봐, 그런 자신을 마주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구한다.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혹시 모를 후회와 회한에 빠지지 않을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지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지혜는 수행된 것에 대한 사후적 해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씩 쌓여 간다. 헤겔의 이야기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아오를 뿐이다.
그런데 여기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선희다. 선희는 백발로 뒤덮인 머리카락에 연약한 체구를 지닌 70대 할머니다. 선희는 갑자기 기억을 잃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남원과 함께 살고 있다. 멀쩡한 선희는 동갑내기 남원과의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지만 남원은 그렇지 못하다.
남원의 기억은 열아홉 살에 멈춰져 있어 늙어버린 자기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선희는 이런 남원을 위해 의사를 물색하고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남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19세의 정분만 찾는다. 그녀의 노년은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선희는 슬퍼하지도, 낙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원의 기억이 19살, 그 중요한 ‘선택’을 했던 시기에 멈춰져 있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때 꿈을 꾸었다. 남원은 서울에 가서 의상디자이너로 성공하기를, 선희 그러니까 정분은 나사에 들어가 달에 가기를 꿈꿨다.
정분은 1969년 한국의 시골에서 포부가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원에게 언제나 생각하는 걸 믿으라고, 불가능한 건 없다고 외쳤다. 정분은 중고 라디오를 고쳐 공중에서 전파를 잡아 틀 줄 알았다. 그리고 아폴로 11호 발사 기념 연설을 들으며 “We choose to go to the moon(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이라는 문장을 마음 깊이 새겼다. 남원은 유명한 의상디자이너가 되어 정분의 꿈을 이뤄 주리라 다짐했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찬란했고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선희는 남원이 왜 ‘그 이후’를 기억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먼저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은 남원이었다. 그는 국제복장학원에서 기다리던 합격 통지서를 받아 서울로 날아가기만 하면 됐었다. 정분 역시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정분은 때맞춰 아픈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고, 남원은 이런 정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들의 이 ‘선택’은 이후의 삶을 꿈과 멀어지게 만든다. 둘은 결혼했으나 남원은 동네 수선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선희는 달 탐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창고에 쳐 박아둔 ‘현실적인’ 할머니가 되었다. 선희는 남원의 바늘이 이들의 현실과 사랑을 지켜낸 ‘검’이라 믿고 평범해졌지만, 남원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선희는 남원에게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그 때’의 기억을 좌충우돌 꺼내놓는 것을 크게 말리지 않는다. 남원은 망원경을 가져오고 그 중고 라디오도 찾아온다. 그리고 정분이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나사 티셔츠도 찾는다.
마지막으로 남원은 선희를 모델로 삼아 하얀 날개처럼 생긴 나사 연구원 복장을 만든다. 이 순간 남원의 꿈은 자신의 옷을 입은 선희에게 흔적처럼 남는다. 그렇게 남원은 기억을 전부 찾는다. 이들이 50년 동안 함께 찍은 사진들과 선희 집에 스며들어 있었던 정분이의 자취들은 끊어진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복원되는 것은 남원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선희 역시 꿈을 꿀 수 있었던 ‘자신’을 기억해낸다. 사실 선희에게 그 기억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선희가 ‘그 때’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었던 건 다소 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사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남원에 대한 미안함을 잊지 않고, 평범하지 않아 힘들었던 자신의 꿈을 잊는 것이 선희가 내린 ‘그 다음’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계는 과거의 선택과 현재의 결과가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완성을 향해 간다. 그들의 행성은 궤도를 돌며 빛을 발한다. 비로소 선희는 언제나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 자신을 선희로 호명하던 정분이가 되어, 남원과 함께 달에 간다.
뮤지컬 <렛미플라이>는 가장 찬란했던 시절 가장 어려운 선택을 했던 선희와 남원이 한결같이 살아온 모습 안에 지혜를 담는다. 그 지혜는 소박하지만 한결같이 지켜진 것이기에 쉽지 않고, 평범한 것이기에 더욱 어렵다.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함께’ 불을 밝히는 그들이 참 아름다운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구한다.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혹시 모를 후회와 회한에 빠지지 않을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지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지혜는 수행된 것에 대한 사후적 해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씩 쌓여 간다. 헤겔의 이야기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아오를 뿐이다.
그런데 여기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선희다. 선희는 백발로 뒤덮인 머리카락에 연약한 체구를 지닌 70대 할머니다. 선희는 갑자기 기억을 잃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남원과 함께 살고 있다. 멀쩡한 선희는 동갑내기 남원과의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지만 남원은 그렇지 못하다.
남원의 기억은 열아홉 살에 멈춰져 있어 늙어버린 자기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선희는 이런 남원을 위해 의사를 물색하고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남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19세의 정분만 찾는다. 그녀의 노년은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선희는 슬퍼하지도, 낙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원의 기억이 19살, 그 중요한 ‘선택’을 했던 시기에 멈춰져 있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때 꿈을 꾸었다. 남원은 서울에 가서 의상디자이너로 성공하기를, 선희 그러니까 정분은 나사에 들어가 달에 가기를 꿈꿨다.
정분은 1969년 한국의 시골에서 포부가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원에게 언제나 생각하는 걸 믿으라고, 불가능한 건 없다고 외쳤다. 정분은 중고 라디오를 고쳐 공중에서 전파를 잡아 틀 줄 알았다. 그리고 아폴로 11호 발사 기념 연설을 들으며 “We choose to go to the moon(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이라는 문장을 마음 깊이 새겼다. 남원은 유명한 의상디자이너가 되어 정분의 꿈을 이뤄 주리라 다짐했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찬란했고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선희는 남원이 왜 ‘그 이후’를 기억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먼저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은 남원이었다. 그는 국제복장학원에서 기다리던 합격 통지서를 받아 서울로 날아가기만 하면 됐었다. 정분 역시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정분은 때맞춰 아픈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고, 남원은 이런 정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들의 이 ‘선택’은 이후의 삶을 꿈과 멀어지게 만든다. 둘은 결혼했으나 남원은 동네 수선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선희는 달 탐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창고에 쳐 박아둔 ‘현실적인’ 할머니가 되었다. 선희는 남원의 바늘이 이들의 현실과 사랑을 지켜낸 ‘검’이라 믿고 평범해졌지만, 남원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선희는 남원에게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그 때’의 기억을 좌충우돌 꺼내놓는 것을 크게 말리지 않는다. 남원은 망원경을 가져오고 그 중고 라디오도 찾아온다. 그리고 정분이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나사 티셔츠도 찾는다.
마지막으로 남원은 선희를 모델로 삼아 하얀 날개처럼 생긴 나사 연구원 복장을 만든다. 이 순간 남원의 꿈은 자신의 옷을 입은 선희에게 흔적처럼 남는다. 그렇게 남원은 기억을 전부 찾는다. 이들이 50년 동안 함께 찍은 사진들과 선희 집에 스며들어 있었던 정분이의 자취들은 끊어진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복원되는 것은 남원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선희 역시 꿈을 꿀 수 있었던 ‘자신’을 기억해낸다. 사실 선희에게 그 기억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선희가 ‘그 때’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었던 건 다소 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사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남원에 대한 미안함을 잊지 않고, 평범하지 않아 힘들었던 자신의 꿈을 잊는 것이 선희가 내린 ‘그 다음’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계는 과거의 선택과 현재의 결과가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완성을 향해 간다. 그들의 행성은 궤도를 돌며 빛을 발한다. 비로소 선희는 언제나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 자신을 선희로 호명하던 정분이가 되어, 남원과 함께 달에 간다.
뮤지컬 <렛미플라이>는 가장 찬란했던 시절 가장 어려운 선택을 했던 선희와 남원이 한결같이 살아온 모습 안에 지혜를 담는다. 그 지혜는 소박하지만 한결같이 지켜진 것이기에 쉽지 않고, 평범한 것이기에 더욱 어렵다.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함께’ 불을 밝히는 그들이 참 아름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