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데토 크로체가 역사를 ‘승자의 역사’로 언급했듯이 역사는 기록하는 시대상이나 기록자가 가진 사상의 세례를 받아 왜곡되고 뒤틀릴 수 있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가가 말을 걸 때만 말한다”는 레오폴트 폰 랑케의 주장처럼 실상 기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권위에 의해 사실로서 지위를 인정받으면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바뀌어 난공불락의 면허를 받게 된다.

이런 역사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책이 나왔다. 그것도 역사학자가 아닌 정통 관료 출신의 손에서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쓴 ‘잘못 쓰인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은 권위적 역사에 대한 통렬한 테러다. 실패한 우리 역사에 주목해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은폐, 왜곡, 과장, 편견을 재구성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무릎을 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승자의 시각'을 통쾌하게 비틀다 [책마을]
그는 시종일관 기존 역사 상식을 깨거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의 평가를 달리하는 주장을 편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역사적 변곡점 기록에 서린 ‘승자의 왜곡’을 파고든다. 만약 백제군이 5000명밖에 안 되고, 의자왕의 실정으로 민심이 피폐해졌다면 신라는 무엇 때문에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였을까. 신라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앞뒤가 맞지 않는 역사 서술은 백제 멸망의 과정에서 뭔가 숨기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병자호란은 미개하고 폭력적인 만주족이 선량한 문화국 조선을 유린한 것이며, 만주족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절개를 높이 기린다’라는 역사 서술은 국내 정치 투쟁의 명분을 지키고자 국가 안보를 포기함으로써 백성을 고난과 치욕으로 몰아넣은 무서운 집단 이기주의 정치 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를 단순한 추정으로 볼 수 없는 것은 필자의 오랜 시간 집요한 탐구와 사료 발굴 노력이 뒷받침하고 있어서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고종에게 덧씌워진 독립투사 이미지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이 망한 이유를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자의 욕심에서 찾는 자기합리화식 역사 서술에도 비판을 가한다. 조선은 출발부터 건국의 명분이 부족했고, 스스로 손발을 묶어 성장을 기대할 수도 없는 나라였다는 진단이다.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승자의 시각'을 통쾌하게 비틀다 [책마을]
이처럼 기존 한국사 서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 역사가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있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억지 주장이 심하고 진영논리에 함몰돼 정의와 공정이 부정되고 사실까지 인정하지 않는 근본 이유도 역사 서술이 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왜곡을 하루빨리 시정해야 대한민국이 바로 서고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실패한 역사에 주목한 것은 중요한 순간에 내린 의사결정의 내용과 결과를 제대로 분석하고 더 나은 대안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라나는 세대의 전략적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승자의 역사를 쓰길 원하는 위정자와 그런 역사 서술에 동참한 기성세대는 물론 전략적 사고능력을 길러야 하는 미래의 인재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유병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