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나헴 프레슬러’는 1923년 12월 16일.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게르만혈통이 아닌 유대인이었다. 그가 1920년대에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을 잉태한 운명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1933년엔 그의 나이 고작 열살이었다. 열 다섯 살 무렵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이태리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하게 된다. 미처 독일을 탈출하지 못한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과 숙모, 사촌형제들은 모두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겨우 도착한 이스라엘에서도 삶을 이어 나가는 건 녹록지 않았다. 그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기아에 허덕이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불행한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그가 1946년 미국에서 열린 ‘드뷔시 콩쿨'에서 우승한 건 거의 기적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미국에도 데뷔했다.

이후 메나헴 프레슬러는 70여 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평생을 피아니스트로 살아왔으며, 메이저 음반사를 통해 60여장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음악을 꽤나 들었다는 클래식 팬들에게조차도 그의 이름은 친숙하지가 않다. 왜일까? 그건 바로 그가 독주자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보자르 트리오 (Beaux Arts Trio)’의 한 멤버로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슬러는 미국 데뷔 이후에도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독주자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1955년 지금의 <탱글우드 음악제>를 통해 '보자르 트리오'로 데뷔한 후에는, 평생 이 트리오의 이름 아래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그동안 팀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네 번이나 바뀌었고, (교체 멤버 중엔 1998년부터 4년간 보자르 트리오 멤버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도 있다.) 첼리스트도 두 번이나 교체됐지만, 그는 2008년 트리오가 해체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이나 꿋꿋이 팀을 지켰다.
©Warner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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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르 트리오'가 해체될 때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그도 함께 은퇴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은퇴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그는 솔리스트 즉,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홀로서기'를 감행했다. 그의 나이 이미 85세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기자들이 연달아 인터뷰를 요청하자 "내가 이 정도로 유명한 줄은 미처 몰랐다."라고 익살을 부릴 정도로 그는 유쾌한 성품이었다. 프레슬러는 이후 파리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등 최고의 오케스트라들과 활발하게 연주하더니, 이에 머물지 않고 90세를 바라보던 2013년에 'BIS'와 '라 돌체 볼타' 레이블을 통해 생애 첫 독주 음반들을 발매하기도 했다.

아래 소개하는 음반이 그 중의 하나인 '비엔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작품집>이다. 아마도 거의 마지막 앨범이 될 것으로 예감하면서 녹음한 레퍼토리 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부해 보일수도 있는 컨셉이지만 그는 전혀 멋부리지 않고 비엔나를 대표해서 활동한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보석들을 골라 멋지게 담아냈다.
© La Dolce Vo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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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맑고 투명하며 유머러스했던 터치는 예전만큼 가볍지 않고, 길고 복잡한 패시지에서는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70년을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 음악은 더 이상 해석이나 기교로 평가받는 예술이 아닌, 긴 삶이자 진솔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긴 삶이 예술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메나헴 프레슬러'는 아흔의 나이인 2014년 1월 11일. 모든 연주자들의 꿈의 무대인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난생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졌다. 어린 시절 자신이 떠나야만 했던 독일의 최고 무대에 무려 75년 만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콘서트는 지금도 '전설의 데뷔 (Debut of a Legend)'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그해에 가장 핫한 연주자들만 설 수 있다는 베를린 필의 유명한 ‘신년전야제’ 콘서트에서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협연했다.
©MEGA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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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슬러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드디어 최고의 클래식 레이블이자 피아노 레이블이기도 한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첫 리사이틀 앨범을 발매한다. 그가 긴 세월을 돌아 택한 작곡가는 그를 처음 음악의 길로 인도했던 드뷔시를 비롯하여, 포레, 라벨 등 그가 사랑했던 프랑스 작곡가였다. 앨범 자켓 속의 온화하고 편안한 프레슬러의 모습처럼, 이 전설적인 연주자의 다음 앨범도 곧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했지만, 지난 5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왔다.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 2023년 5월 6일 영국 런던에서 99세의 나이로 타계!
열 다섯에 독일 탈출한 피아니스트, 아흔에 베를린 필하모니홀에 서다


평생을 보자르 트리오의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후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우리를 떠나갔다. 먼저 세상을 떠난 위대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메나헴 프레슬러를 '진정한 피아노의 시인'이라 칭송했으며, 까칠하기로 유명한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 마저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훨씬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며, 현대예술의 이기심, 욕심, 냉소를 날려버리고 작곡가들의 의도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을 회복시킨 연주자로 평하기도 했다.

메나헴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위로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며, 평생 예술로 우리를 위로하던 피아니스트가, 이제는 하늘에서 모차르트도 만나고 베토벤도 만나고 드뷔시도 만나셨기를 기대해 본다. 아듀! 메나헴 프레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