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에 수백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책마을]
“재단사, 대장장이, 목공, 석공 등 모든 기능공과 노동자는 왕의 재위 20년(1346~1347년) 혹은 그 언저리 시절 임금보다 더 받으면 안 된다. 만약 더 받는다면 투옥할 것이다.”

1349년 영국 에드워드3세 자문위원회는 ‘노동자 조례’를 작성해 근로자 임금을 흑사병 창궐 이전 수준으로 붙들어 매려 했다. 흑사병이 덮쳐 인구가 급감한 영향으로 임금이 치솟고 물가가 거침없이 뛴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상한선 이상 임금을 받는다면 구금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혹한 법규만으로 임금 상승의 도도한 물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당수의 장원 기록부는 근로자들이 각종 ‘조례’와 ‘법령’이 규정한 것을 크게 웃도는 임금을 받았음을 증명한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에 수백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책마을]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은 국내 중세사 전문학자가 흑사병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한 학술서다. 어느덧 희미한 기억이 된 코로나19처럼 인류사에 큰 충격을 입혔지만,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중세 대역병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살펴본다.

페스트(페스티스)나 전염병(에피데미아), 죽을병(모르탈리타스) 등으로 불리던 역병에 ‘검은 죽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르스 니그라’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당대의 연대기작가 시몽 드 쿠뱅이었다. 화농성 농양 탓에 사타구니 등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유발하는 증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명칭이었다.

강렬한 병명만큼이나 전염병이 중세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당대의 문헌들은 1348년 여름 피렌체 인구의 4분의 3이 사망했고, 케임브리지셔 지역 인구의 80% 이상이 죽었다고 전한다. 과장을 고려해도 1347~1351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대재난은 재앙을 불러온 원인 찾기로 이어졌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1348~1351년 사이 신성로마제국 내 400개가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유대인이 학살됐다. 도시의 권력자들은 ‘채권자가 사라지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유대인에 대한 보호막을 거뒀다.

재난은 치명적이었지만 점성술과 체액론에 근거한 당대의 의술은 병의 원인을 구분하지 못했고, 치료법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대재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들은 후대인이 보기엔 애처로울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도 적지 않다. 생존을 위협받자 외부에 대한 혐오가 분출하고 희생자를 찾아 사회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그렇게 역사는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 역할을 한다.

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