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김중업, 잿더미의 조국에서 그의 시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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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22회)
-프랑스대사관 2: 스승과 제자, 시대를 건축하다
-프랑스대사관 2: 스승과 제자, 시대를 건축하다
우리 건축사에서 걸출한 두 명의 건축가를 꼽으라면 단연 김수근과 김중업을 꼽을 것이다. 김수근은 구(舊) 공간 사옥을 비롯해 경동교회, 부여박물관, 세운상가 등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모래사장이었던 여의도를 최초로 설계한 사람도 김수근이다. 김중업도 만만치 않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서강대 본관, 프랑스대사관, 올림픽광장 세계평화의 문, 작품 수에서는 김수근보다 적지만 굵직한 작품들이다. 63빌딩이 세워지기 전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꼽으라면 31층 높이의 31빌딩인데 그 빌딩을 설계한 사람도 김중업이다.
김수근은 박대통령과 궁합이 잘 맞는 건축가였다. ‘근대화 대통령’ 박정희의 구상에 따라 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 계동 현대 사옥 옆의 조그만 건물, 구 공간사옥을 지나다 보면 거장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장충동 족발골목에 오르기 전 붉은 벽돌의 경동교회, 벽돌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숭고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경찰청 인권 보호 센터'로 이름이 바뀐 ‘남영동 대공 분실’도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 '1987'에 등장하는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난 현장.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 폐쇄형 렌즈, 고문의 고통으로 투신하지 못하게 창문의 너비를 좁게 한 장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도록 휘감아 올라가는 철제 계단, 이런 치밀한 장치들은 김수근이 고안한 것이다. 옥의 티다. 그러나 그의 미적 영감과 섬세함이 그를 시대를 이끄는 건축가로 만들었다.
김중업은 김수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1970년 4월, 대통령 박정희와 서울시장 김옥현의 무리한 욕심으로 비탈 위에 세운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그해 8월 졸속 추진한 '철거민 이주' 때문에 발생한 ‘광주 대단지 사건’ 관련해 정부의 주택 정책을 질타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해외로 강제 추방된다.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국적 불명자가 됐다가 1978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작품 수가 김수근보다 적은 이유이다.
그가 한국의 주목할 만한 건축가가 된 것은 스승의 영향이 컸다.
한국전이 한창인 1952년, 부산에서 이중섭을 비롯한 예술가들과 다방을 전전하던 김중업은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의 추천으로 베니스 ‘세계 예술가대회’에 참석한다. 김소운, 김말봉, 오영진, 윤호중과 부산의 수영비행장에서 수송기에 올라 4일 만에 베니스에 도착한다. 각국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류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는 세계적인 행사였다. 전쟁이 한창인 가난한 나라의 예술가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김중업은 행사장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년~1965년)를 만난다. 르 꼬르뷔지에, 그를 모르면 현대 건축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그가 구축해 놓은 건축의 토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화가였다. 본명은 에두아르 잔느레. 미술사적으로도 유명한 20세기 초반 순수주의(Purism) 사조를 만든 사람이다. 그의 관심 영역에는 한계가 없었다. 오늘 날의 정형화된 의자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건축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나를 건축가로 알지, 화가로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강을 통해서 나는 건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술학도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건축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1926년에 근대 건축의 5원칙이라 불리는 도미노 이론(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 자유로운 파사드)을 완성했다. 도미노는 집을 뜻하는 도무스 domus와 혁신을 뜻하는 이노베이션 innovation의 합성어이다.
당시에는 건축물을 중세 시대의 육중한 건물, 벽돌로 짓는 집으로만 생각했다. 그가 착안한 것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나라는 잿더미였다. 쉽고 빠른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니 1층에 필로티를 만들어 건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벽도 내력벽이 아닌 자유롭게 평 유리로 대체할 수 있었다. 굳이 외벽이 건물을 지탱하지 않아도 되니 평면의 배치도가 달라졌다.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거나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건물은 쉽고 빠르게 지어졌고 인간 중심의 집이 되었다. 이는 혁명이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신세계 백화점, 일제강점기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이라 부르던 이 건물의 옥상에도 정원이 있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일찍부터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김중업은 베니스의 예술가 대회에서 르 꼬르뷔지에를 처음 만난 후 무작정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제자가 됐다. 가난한 나라 청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3년여 개월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는 건축사무소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었다. 김중업이 1956년 2월 여의도 비행장에 내릴 때 조국은 아직도 잿더미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대가 된 것이다.
김중업의 건축 세계는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본인의 회고와 같이 작품에 한국의 얼을 담으려고 애썼고 프랑스 대사관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형태, 공간적 디자인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바탕에 한국적 미학을 더해 만든 작품이 프랑스대사관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잿더미가 된 유럽을 재건했고 김중업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바르게 개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강을 건너 건축에 도달한 거장, 스승의 가르침 위에 한국적인 선(善)을 입힌 김중업.
김중업은 부산 피난 시절 아내 남덕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이중섭을 위해 국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이중섭에게 "왜 바보 같이 눈물만 흘리냐"고 말하며 함께 울었던 사람. 그의 휴머니즘도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 보호 센터'로 이름이 바뀐 ‘남영동 대공 분실’도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 '1987'에 등장하는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난 현장.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 폐쇄형 렌즈, 고문의 고통으로 투신하지 못하게 창문의 너비를 좁게 한 장치, 위치 파악이 불가능하도록 휘감아 올라가는 철제 계단, 이런 치밀한 장치들은 김수근이 고안한 것이다. 옥의 티다. 그러나 그의 미적 영감과 섬세함이 그를 시대를 이끄는 건축가로 만들었다.
김중업은 김수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1970년 4월, 대통령 박정희와 서울시장 김옥현의 무리한 욕심으로 비탈 위에 세운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그해 8월 졸속 추진한 '철거민 이주' 때문에 발생한 ‘광주 대단지 사건’ 관련해 정부의 주택 정책을 질타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해외로 강제 추방된다.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국적 불명자가 됐다가 1978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작품 수가 김수근보다 적은 이유이다.
그가 한국의 주목할 만한 건축가가 된 것은 스승의 영향이 컸다.
한국전이 한창인 1952년, 부산에서 이중섭을 비롯한 예술가들과 다방을 전전하던 김중업은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의 추천으로 베니스 ‘세계 예술가대회’에 참석한다. 김소운, 김말봉, 오영진, 윤호중과 부산의 수영비행장에서 수송기에 올라 4일 만에 베니스에 도착한다. 각국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류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는 세계적인 행사였다. 전쟁이 한창인 가난한 나라의 예술가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김중업은 행사장에서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년~1965년)를 만난다. 르 꼬르뷔지에, 그를 모르면 현대 건축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그가 구축해 놓은 건축의 토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화가였다. 본명은 에두아르 잔느레. 미술사적으로도 유명한 20세기 초반 순수주의(Purism) 사조를 만든 사람이다. 그의 관심 영역에는 한계가 없었다. 오늘 날의 정형화된 의자도 그의 작품이다.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건축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나를 건축가로 알지, 화가로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강을 통해서 나는 건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술학도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건축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1926년에 근대 건축의 5원칙이라 불리는 도미노 이론(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 자유로운 파사드)을 완성했다. 도미노는 집을 뜻하는 도무스 domus와 혁신을 뜻하는 이노베이션 innovation의 합성어이다.
당시에는 건축물을 중세 시대의 육중한 건물, 벽돌로 짓는 집으로만 생각했다. 그가 착안한 것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나라는 잿더미였다. 쉽고 빠른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니 1층에 필로티를 만들어 건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벽도 내력벽이 아닌 자유롭게 평 유리로 대체할 수 있었다. 굳이 외벽이 건물을 지탱하지 않아도 되니 평면의 배치도가 달라졌다.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거나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건물은 쉽고 빠르게 지어졌고 인간 중심의 집이 되었다. 이는 혁명이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신세계 백화점, 일제강점기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이라 부르던 이 건물의 옥상에도 정원이 있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일찍부터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김중업은 베니스의 예술가 대회에서 르 꼬르뷔지에를 처음 만난 후 무작정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제자가 됐다. 가난한 나라 청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3년여 개월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는 건축사무소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었다. 김중업이 1956년 2월 여의도 비행장에 내릴 때 조국은 아직도 잿더미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대가 된 것이다.
김중업의 건축 세계는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본인의 회고와 같이 작품에 한국의 얼을 담으려고 애썼고 프랑스 대사관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형태, 공간적 디자인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바탕에 한국적 미학을 더해 만든 작품이 프랑스대사관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 잿더미가 된 유럽을 재건했고 김중업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바르게 개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강을 건너 건축에 도달한 거장, 스승의 가르침 위에 한국적인 선(善)을 입힌 김중업.
김중업은 부산 피난 시절 아내 남덕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이중섭을 위해 국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이중섭에게 "왜 바보 같이 눈물만 흘리냐"고 말하며 함께 울었던 사람. 그의 휴머니즘도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원천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