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곳의 한 오두막집에서 추상화가 L의 오픈 스튜디오 행사가 있었다. 화가의 작업실을 개방해서 누구나 그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첫날 화가부부가 지인들을 불러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근처에 사는 나도 초대를 받아 당당히(?) 합류했다. 해가 뉘엿해지는 오후, 산속마당에 모닥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고 와인을 놓았다. 재즈 타악기의 거장 류복성 선생도 4중주로 공연을 펼쳤다. 늦가을 숲속에서 듣는 재즈가 근사한 그림이다.
(추천음악) Ornette Coleman – Free Jazz
하지만 그림이든 음악이든 전위적인 것은 대중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프리재즈라는 것도 실수마저 숨겨진 의도였다고 설파하다 비판 받았다. 추상화도 정체를 알 수 없기에 혼란스럽다. 반면에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는 찬성론이 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자연을 떠올리든 우주를 상상하든 각자의 자유다. 나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재즈에서만큼은 그런 자유를 누린다. 마음껏 느끼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전위라는 건 앞서가는 뒤통수만 보여줄 뿐 뒤돌아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전위도 뭣도 아닐 것이다.
운치가 이러하니 공연을 마친 류복성 선생도 약주를 걸쳤다. 류 선생이야말로 재즈뮤지션으로 평생 즉흥연주를 해온 장본인이다. 내 생각에 그의 연주는 지금이 최고로 멋지다. 8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휘영청한 젊은 날보다 훨씬 섬세하고 깊다. 긴 세월동안 얻은 것은 소리 그 자체일지 모른다. 그저 북 하나로 오만가지 소리를 내는데 달빛의 고요함마저 담아내는 듯하다.
화가가 꺼져가는 모닥불을 되살리니 검댕이 숯이 안간힘을 쓴다. 그걸 보고 있자니 흔들리는 불씨에도 영혼이 있는 것 같다. 속세와 분리된 그곳에 뜨거운 열망이 춤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