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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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최대 야당인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해체 위기에 놓였다. 미국 월가 출신의 스테파노스 카셀라키스 대표에 반기를 든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다. 이탈리아, 핀란드, 스위스 등에서 극우 정당이 연달아 집권에 성공한 것과 대조적으로 유럽 좌파 세력의 결집력은 약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23일(현지시간) 에피 악치오글라 전 노동부 장관을 포함한 중진 의원 9명이 시리자 탈당을 선언했다. 악치오글라 전 장관은 지난 9월 치러진 당 대표 선거에서 카셀라키스 대표와 경쟁했던 인물이다.

이들 의원은 성명에서 “카셀라키스 대표는 민주적으로 선출됐지만, 비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그는 시리자를 해체해 형태가 없는 정당으로 만들려 한다. 그의 정치 브랜드는 아무런 깊이가 없고, 모순된 견해로 뒤범벅돼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지난 12일에도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전 재무장관을 포함한 의원 2명이 시리자를 떠났다. 차칼로토스 전 장관이 이끄는 당내 좌파 진영은 당시 카셀라키스 대표의 “우파적 포퓰리즘과 광신주의, 좌파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에 대한 증오 등 ‘트럼프(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적’ 관행” 때문에 당원들의 ‘대이탈’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써 시리자의 의석수는 기존 47석에서 36석으로 줄어들었다. 3당인 변화운동(PASOK-KINAL·파속)보다 단 4석 많은 수준이다. 그리스 의회는 총 300석으로 구성돼 있다. 디미트리오스 파파디물라스 시리자 부통령이 탈당 행렬에 가담하면서 유럽의회 소속 시리자 당원은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전 대표가 집권하던 당시 주요 부처 장관직을 수행했던, 당내 핵심 세력으로 불려 온 40대 의원 대부분이 시리자를 떠난 상태라는 점에서 당의 해산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리자가 “정체성 위기에 직면했다”고 짚었다.

시리자 측은 성명을 내고 “탈당한 의원들이 수만 명의 시리자 당원들의 민주적 선거를 거쳐 내린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라며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리스 좌파 역사상 최초의 분열은 논쟁을 포함한 당내 절차 없이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이탈 행위를 비판했다.

카셀라키스는 일찍이 그리스를 떠나 미국에서 자랐고,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에서 트레이더로 일한 경험이 있다. 무명의 정치 신인인 그가 지난 9월 당 대표로 ‘깜짝’ 선출되자, 시리자 핵심 지도부는 그를 “그리스와도, 좌파와도 거리가 먼 인물”로 규정하며 크게 반발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 출신이 반(反)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시리자의 대표가 된 걸 두고 “정치적 블랙 코미디”(그리스 최대 일간지 카티메리니)라는 평가가 나왔었다.

유권자들은 ‘새 얼굴’인 카셀라키스에 ‘새 정치’를 기대했지만, 그는 뚜렷한 정치적 의제를 제시하지 못했고 지지율 반등을 이끌어내는 데도 실패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시리자는 군소 정당인 그리스공산당(KKE)과 비슷한 수준을 득표하며 3위 정당으로 뒤처졌다.

일각에선 탈당한 의원들이 내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정당을 꾸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 좌파는 이미 여러 군소정당으로 분열된 상태다. 이 중 두 개가 시리자 출신 의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리자는 유로존 부채 위기가 고조되던 2015년 유럽연합(EU)이 요구한 재정 긴축 거부를 공약으로 내세운 치프라스 전 대표를 필두로 세력을 키워 왔다. 그러나 지난 6월 치프라스 전 대표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15년 만에 물러난 이후 수개월째 내부 혼란을 봉합하지 못하고 있다. 시리자는 당시 총선에서 중도 우파 성향의 신민주주의당(ND)에 22%포인트 이상의 지지율 격차로 패배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