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인생을 배우는 경전 같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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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정영목 옮김, 어크로스, 2023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정영목 옮김, 어크로스, 2023
소설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소설이 아리송하고 모호한데, 그 빈틈이 매력적일수록 더욱 그렇다(어쩌면 그 소설을 좋아하게 되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특히 더 입이 간지러워지곤 한다. 명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논픽션에 비해선 해석의 여지가 있고, 보다 너른 해석의 여지가 함의된 시에 비하면 좀더 소통의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는 오독이 없다. 문학은 모든 걸 가능케 하고, 그 자유가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보다 정답에 가깝게 다다르고 싶은 독자의 욕망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누군가 내게 말하고 있다면, 잘 알아듣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닐까. 나 또한 소설을 더 찰떡같이 알아듣고 싶어서 편집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소설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집어든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내 올해의 책이 되었다. 러시아 단편소설 7편에 해석을 덧붙이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대단하다고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정도겠지 싶었는데, 소설을 이리 깊이 읽을 수 있다니… 우리 팀장님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에 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인생을 배우는 경전과도 같았다고.
첫 장인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가 압권이다. 주인공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가 등장하고, 그녀가 탄 마차가 도로를 달려 어딘가로 향한다. 그리고 17줄 만에 소설이 끊기더니, 손더스는 “이제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가 아니다. 당신 마음 상태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묻는다. 이어 족히 다섯 배는 넘는 말을 덧붙인다… 바로 이 짧은 단락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꼈는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냐고, 이런 식의 시작이 어떤 다음을 예비하곤 하는지, 읽는 당신은 이제 무얼 기대하고 있는지.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손더스는 단편을 잘게 잘라 중간중간 ‘지침’을 삽입한다. 이와 같은 리뷰를 본 적 있었던가…? 그런데, 그래서는 왜 안 될까? 우리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중간에 멈춰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손더스의 이 모든 물음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다. 매 문장마다 “한 줄에서 다음 줄로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
이렇게 말은 하지만 처음엔 어처구니없었고 맥도 빠졌었다. 소설에 막 몰입할라치면 갑자기 손더스가 나타나서 소설보다 훨씬 긴 분량으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만… 나타나지 않으셔도 소설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준비되어 있다니까요!
<마차에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읍내로 향하는 마리야의 내면은 아름다운 풍경도 황량하게 느낄 만큼 황폐하다. 그녀가 사랑하거나, 그녀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고 보잘것없는 급여로 영위해야 할 미래는 암담한 탓이다. 도중에 안면이 있는 잘생긴 귀족 하노프를 마주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고, 잠시 쉬려고 들른 곳에서는 무례한 대접을 받는다. 마리야는 서러움과 서글픔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즉 <마차에서>는 서사만으로 두드러지는 건 아니다. 물론 이 소설은 체호프의 소설이다.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아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진득하게 새겨넣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다면? 체호프는 육백여 편의 단편을 썼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단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차에서>는 현재 한국에 번역본으로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 손더스는 <마차에서>를 망각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낸다. 가엾은 마리아의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넘치는 순간, 손더스는 옆에 다가와 묻는다. “여기가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크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외로움은 진짜이고 심각해서 그 안에 갇힌 우리 일부에게는 빠져나갈 쉬운 길이 없으며 가끔은 아예 출구가 없기도 하다. 우리는 마리야에게 마음을 쓰고, 하노프가 그녀를 도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갑자기 그는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가?” 어어… 그때 나는 마리야를 깊이 굽어보는 하나의 시선을 분명히 느꼈다.
잠시 들른 찻집에서 천대받는 마리야를 보며 손더스는 “그녀는 한계가 있으며, 유능하다고 말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소명도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위축되게 만드는 이 러시아라는 나라는 뭔가?” 묻는다. “긴급한 상황 때문에 최선의 자아를 희생한 채 살아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압력 때문에 우아함을 버려야 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마리야를 상상해 보라”는 데에 이르면 손더스가 소설에 손을 집어넣어 크게 넓힌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실로 중요한 건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 온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자족적으로 선순환하는 감탄스러운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을 읽고 ‘아, 재밌게 읽었다’ 하며 책을 덮은 뒤 금세 잊어버리는 것도 사실 나쁘진 않지만, 현실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좋다. 즉 이 소설이 현실 속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느냐, 소설 속 인물이 맞닥뜨린 사건을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이입하게 만드느냐의 문제다.
지름길로 가려던 마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흙탕물 강을 건너다 옷과 식료품이 전부 젖어버린 마리야는 한없는 절망을 느끼는데, 마침 절묘하게도 하노프와 다시 마주친다. 그 순간 손더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소생하여 과거의 근심 없고 행복하고 희망 가득한 젊은 소녀로 탈바꿈한다. 갑자기 힘을 되찾은 슈퍼 히어로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늘 그녀가 살고 있는 이 험한 세상이 곧 교정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바라게 된다.”
소설을 읽는 우리야말로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깊이 몰입하고 있는 소설이 정직하게 비극적 결말로 향하는 걸 느낀다면 제발 주인공이 몰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주인공이 몰락해야 이 소설이 더 나은 소설이 된다는 걸 예감하면서도. 구렁텅이에서 천국으로 상승할 수 있는 일말의 빛이 비친다면 그 빛을 어서 거머쥐기를 바란다, 설령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전개가 마치 로또 당첨과도 같은 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소설이 끝내 우리의 바람을 외면할 때, 손더스는 곁에 남아 정처없는 발걸음에 함께한다. “그러나 아름답게 끝난 이야기의 특징은 우리가 인물의 삶이 이야기 너머까지 이어진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 이것을 외로움, 진짜 외로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외로움을 인간적 크기로 그려낸 가슴 아픈 묘사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마리야의 내부에서부터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 고도의 기교를 이용한 이 이야기의 내면성은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그녀를 우리와 엮어놓는다.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외롭고 불완전한 누군가, 또는 불완전한 (외로운) 우리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롭고 불완전한 마리야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음과 같은 말에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마차에서>를 몇 페이지씩 읽는 동안 처음 출발할 때 텅 비어 있던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친구 마리야로 가득하게 되었다. (…) 그녀는 당신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다. 다음에 누가 어떤 사람을 외롭다고 묘사할 때면 당신은 마리야와 나눈 우정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설사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해도 더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다음 장에서 만날 새 단편과 이어질 내용들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지 않기도 했다. 이 이상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려 매 소설마다 크게 감읍하고, 마지막 단편인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사>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칼럼을 읽는 분께 <마차에서>의 재미를 일부 빼앗았을 수 있으므로 뒤의 즐거움은 보존해드리고 싶다.
어떤 리뷰는 소설을 더 좋게 만들어준다. 그 리뷰가 있기 전에는 소설이 보다 덜 발견되어 있었고, 그 리뷰 이후로는 소설이 더 활짝 빛나게 되는 그런 리뷰. 소설에 대한 손더스의 첨언을 이렇게나 많이 옮기게 된 것은, 지금 여기에 듣고 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에나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은 잘 말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는 아닐지.
작가가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말해진 것의 이면까지 함께 읽으면서도 이야기에 깊이 동화되어서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리뷰는 여전히 너무나도 부족하고 필요하다. 한편으로 나 또한 원고를 마주하면서 ‘내가 정말로 이 원고를 잘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죽이며 살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워졌다. 나의 부족을 직면한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까봐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더스는 질책보다는 따듯한 손을 건넨다. 읽는 내 바로 옆에서 누구보다 다정한 투머치토커가 믿음직스러운 페이스메이커를 해준다면 힘을 더 내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 소설과, 소설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힘이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보게 되리라 예감한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이미 내게 2023년의 책이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았을 때 어쩌면 내 인생의 책을 만났다고 회고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에는 오독이 없다. 문학은 모든 걸 가능케 하고, 그 자유가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보다 정답에 가깝게 다다르고 싶은 독자의 욕망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누군가 내게 말하고 있다면, 잘 알아듣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닐까. 나 또한 소설을 더 찰떡같이 알아듣고 싶어서 편집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소설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집어든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내 올해의 책이 되었다. 러시아 단편소설 7편에 해석을 덧붙이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대단하다고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정도겠지 싶었는데, 소설을 이리 깊이 읽을 수 있다니… 우리 팀장님의 말을 빌리자면, 문학에 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인생을 배우는 경전과도 같았다고.
첫 장인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가 압권이다. 주인공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가 등장하고, 그녀가 탄 마차가 도로를 달려 어딘가로 향한다. 그리고 17줄 만에 소설이 끊기더니, 손더스는 “이제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가 아니다. 당신 마음 상태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묻는다. 이어 족히 다섯 배는 넘는 말을 덧붙인다… 바로 이 짧은 단락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꼈는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냐고, 이런 식의 시작이 어떤 다음을 예비하곤 하는지, 읽는 당신은 이제 무얼 기대하고 있는지.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손더스는 단편을 잘게 잘라 중간중간 ‘지침’을 삽입한다. 이와 같은 리뷰를 본 적 있었던가…? 그런데, 그래서는 왜 안 될까? 우리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중간에 멈춰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손더스의 이 모든 물음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다. 매 문장마다 “한 줄에서 다음 줄로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을 추적하는 것”.
이렇게 말은 하지만 처음엔 어처구니없었고 맥도 빠졌었다. 소설에 막 몰입할라치면 갑자기 손더스가 나타나서 소설보다 훨씬 긴 분량으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만… 나타나지 않으셔도 소설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준비되어 있다니까요!
<마차에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읍내로 향하는 마리야의 내면은 아름다운 풍경도 황량하게 느낄 만큼 황폐하다. 그녀가 사랑하거나, 그녀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고 보잘것없는 급여로 영위해야 할 미래는 암담한 탓이다. 도중에 안면이 있는 잘생긴 귀족 하노프를 마주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고, 잠시 쉬려고 들른 곳에서는 무례한 대접을 받는다. 마리야는 서러움과 서글픔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즉 <마차에서>는 서사만으로 두드러지는 건 아니다. 물론 이 소설은 체호프의 소설이다.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아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진득하게 새겨넣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다면? 체호프는 육백여 편의 단편을 썼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단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차에서>는 현재 한국에 번역본으로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 손더스는 <마차에서>를 망각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낸다. 가엾은 마리아의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넘치는 순간, 손더스는 옆에 다가와 묻는다. “여기가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크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외로움은 진짜이고 심각해서 그 안에 갇힌 우리 일부에게는 빠져나갈 쉬운 길이 없으며 가끔은 아예 출구가 없기도 하다. 우리는 마리야에게 마음을 쓰고, 하노프가 그녀를 도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갑자기 그는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가?” 어어… 그때 나는 마리야를 깊이 굽어보는 하나의 시선을 분명히 느꼈다.
잠시 들른 찻집에서 천대받는 마리야를 보며 손더스는 “그녀는 한계가 있으며, 유능하다고 말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소명도 없는 일을 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위축되게 만드는 이 러시아라는 나라는 뭔가?” 묻는다. “긴급한 상황 때문에 최선의 자아를 희생한 채 살아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압력 때문에 우아함을 버려야 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마리야를 상상해 보라”는 데에 이르면 손더스가 소설에 손을 집어넣어 크게 넓힌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실로 중요한 건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 온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자족적으로 선순환하는 감탄스러운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을 읽고 ‘아, 재밌게 읽었다’ 하며 책을 덮은 뒤 금세 잊어버리는 것도 사실 나쁘진 않지만, 현실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좋다. 즉 이 소설이 현실 속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느냐, 소설 속 인물이 맞닥뜨린 사건을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이입하게 만드느냐의 문제다.
지름길로 가려던 마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흙탕물 강을 건너다 옷과 식료품이 전부 젖어버린 마리야는 한없는 절망을 느끼는데, 마침 절묘하게도 하노프와 다시 마주친다. 그 순간 손더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소생하여 과거의 근심 없고 행복하고 희망 가득한 젊은 소녀로 탈바꿈한다. 갑자기 힘을 되찾은 슈퍼 히어로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늘 그녀가 살고 있는 이 험한 세상이 곧 교정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바라게 된다.”
소설을 읽는 우리야말로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깊이 몰입하고 있는 소설이 정직하게 비극적 결말로 향하는 걸 느낀다면 제발 주인공이 몰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주인공이 몰락해야 이 소설이 더 나은 소설이 된다는 걸 예감하면서도. 구렁텅이에서 천국으로 상승할 수 있는 일말의 빛이 비친다면 그 빛을 어서 거머쥐기를 바란다, 설령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전개가 마치 로또 당첨과도 같은 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소설이 끝내 우리의 바람을 외면할 때, 손더스는 곁에 남아 정처없는 발걸음에 함께한다. “그러나 아름답게 끝난 이야기의 특징은 우리가 인물의 삶이 이야기 너머까지 이어진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점이다. (…) 이것을 외로움, 진짜 외로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외로움을 인간적 크기로 그려낸 가슴 아픈 묘사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마리야의 내부에서부터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 고도의 기교를 이용한 이 이야기의 내면성은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그녀를 우리와 엮어놓는다.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외롭고 불완전한 누군가, 또는 불완전한 (외로운) 우리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롭고 불완전한 마리야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음과 같은 말에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마차에서>를 몇 페이지씩 읽는 동안 처음 출발할 때 텅 비어 있던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친구 마리야로 가득하게 되었다. (…) 그녀는 당신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다. 다음에 누가 어떤 사람을 외롭다고 묘사할 때면 당신은 마리야와 나눈 우정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설사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해도 더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다음 장에서 만날 새 단편과 이어질 내용들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지 않기도 했다. 이 이상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려 매 소설마다 크게 감읍하고, 마지막 단편인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사>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칼럼을 읽는 분께 <마차에서>의 재미를 일부 빼앗았을 수 있으므로 뒤의 즐거움은 보존해드리고 싶다.
어떤 리뷰는 소설을 더 좋게 만들어준다. 그 리뷰가 있기 전에는 소설이 보다 덜 발견되어 있었고, 그 리뷰 이후로는 소설이 더 활짝 빛나게 되는 그런 리뷰. 소설에 대한 손더스의 첨언을 이렇게나 많이 옮기게 된 것은, 지금 여기에 듣고 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에나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은 잘 말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는 아닐지.
작가가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말해진 것의 이면까지 함께 읽으면서도 이야기에 깊이 동화되어서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리뷰는 여전히 너무나도 부족하고 필요하다. 한편으로 나 또한 원고를 마주하면서 ‘내가 정말로 이 원고를 잘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죽이며 살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워졌다. 나의 부족을 직면한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까봐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더스는 질책보다는 따듯한 손을 건넨다. 읽는 내 바로 옆에서 누구보다 다정한 투머치토커가 믿음직스러운 페이스메이커를 해준다면 힘을 더 내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 소설과, 소설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힘이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보게 되리라 예감한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이미 내게 2023년의 책이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았을 때 어쩌면 내 인생의 책을 만났다고 회고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