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업체 근로자가 파견 상태를 인정받더라도 자신과 똑같거나 비슷한 업무가 원청에 없다면 임금 차액을 청구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연이어 나왔다. 임금 수준을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원청 정직원으로 일했으면 얼마를 더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법원 논리다. 불법 파견 여부를 다투는 소송에서 패소하면 하청 근로자를 직접 고용해야 할 뿐 아니라 최대 10년치 임금 차액까지 지급해야 할 수 있다는 부담에 짓눌렸던 기업들의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임금 비교 대상 없는 고속도로 수납원

"하청 직고용 인정돼도 임금 더 줄 필요없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의정부지방법원 민사11부(부장판사 권희)는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요금수납원 171명이 서울고속도로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고들의 임금차액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서울고속도로가 원고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원청에서 일했다면 받았을 임금과 실제 지급받은 임금의 차액을 손해배상할 필요까진 없다고 결론 내렸다. 원고들은 “서울고속도로 4급 사무기술직과 똑같은 임금과 경영성과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서울고속도로는 경기 고양시 일산~남양주시 퇴계원을 잇는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를 운영하는 업체로 2006년부터 고속도로 통행료 수납업무를 용역업체에 맡겨왔다. 이 과정에서 업무 매뉴얼과 교육 교재 등을 용역업체에 배포해 요금 수납원들이 따르도록 했다.

처음부터 총괄관리직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외주화했기 때문에 이 회사에는 원고들과 같거나 비슷한 업무 자체가 없다. 재판부는 “원고들과 서울고속도로의 4급 사무기술직은 채용 조건과 절차뿐 아니라 업무의 내용·권한·책임 등에서 차이가 상당하다”며 “원고들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4급 사무기술직의 근로가치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최근 다른 불법 파견 사건에서도 이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대전지법 공주지원은 지난 2월 고속도로 요금수납원 32명이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들의 임금 차액 지급 청구를 기각했다. 4월 대법원으로부터 “원청에 직고용 책임이 있다”는 확정 판결을 받은 신대구부산고속도로 협력업체 근로자 124명 역시 임금 차액을 달라는 주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1·2심에서 임금 차액 청구가 기각되자 대법원에선 파견 여부를 두고만 다퉜다. 이 재판 역시 원고들과 비교할 만한 업무가 원청에 없다는 것이 중요한 판단 근거로 작용했다.

○적정 보상 두고 장기 공방 예고

이번 판결로 불법 파견 분쟁에 휘말린 기업들의 부담이 다소 완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4월 대법원이 삼표시멘트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원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최대 10년치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 상당한 파장이 일었던 상황이다.

지금까지 임금채권 소멸시효(3년)를 적용해 손해배상을 요구하던 하청 근로자들이 이 판결을 참고해 불법행위 손해배상 소멸시효(10년)를 기준으로 임금 차액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여기에 원청에 동종·유사 업무가 없음에도 하청 근로자 주장대로 임금 차액이 결정된다면 기업의 부담은 더 커졌을 것이란 분석이다.

노동계에선 “동종·유사 업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차액을 한 푼도 못 받아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임금 차액 산정을 두고는 치열한 법정 싸움이 계속될 전망이다. 하청 근로자들은 “비교 대상이 없다면 최소한 원청에서 가장 나쁜 조건으로 일하는 정직원이라도 비교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대형로펌 노동담당 변호사는 “원청에 비교할 업무가 없을 때 얼마의 임금 차액을 줘야 하는지가 불법 파견 분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