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지휘 마리오 벤자고)과 협연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지휘 마리오 벤자고)과 협연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스위스 출신 지휘자 마리오 벤자고는 이전에도 몇 차례 내한 공연을 가진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2017년 서울시향과의 공연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 벤자고는 베르디와 베토벤, 슈만(교향곡 제3번)의 작품을 지휘했다. 상당히 훌륭한 연주였지만, 연주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태도였다. 커튼콜 때 무대 위를 펄쩍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보는 이마저 절로 웃음을 짓게 했었다. 새삼 돌이켜 봐도 즐거운 추억이다. 이번에도 그가 똑같은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객석에 앉았다.

올해 KBS교향악단은 전례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도 예외는 아니어서, 별로 혹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 곡들 위주로 선곡했다. 첫 곡은 슈베르트가 쓴 오페라 <피에라브라스>의 서곡이었는데, 슈베르트가 오페라를 꽤 많이 썼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도 적지는 않을 듯하다.

<피에라브라스>는 슈베르트가 특히 심혈을 기울여 쓴 오페라였지만, 그의 다른 오페라들과 마찬가지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머잖아 그대로 묻혀 버린 작품이다. 그나마 서곡은 콘서트 무대에 오를 때가 있지만, 이마저도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곡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 순서인 슈만의 ‘교향곡 제2번’ 역시 지명도는 조금 더 있을지언정 자주 연주되는 곡은 아니다. 이런 곡들을 연주할 때는 명확하고 일관된 접근법이 필요한 법이다.
스위스 출신 명장 마리오 벤자고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스위스 출신 명장 마리오 벤자고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실제로 벤자고와 KBS교향악단은 세 곡 모두에서 대동소이한 접근법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성대한’, 즉 음량이 크고 화려한 연주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공연을 듣고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연은 지휘자의 해석이 오케스트라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양자 사이에 불화가 있을 때 나오기 마련인 소극적인 연주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KBS교향악단은 일관되게 정연하면서도 생생하고 대비가 명확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특히 여린 계통의 셈여림(pp~mp)을 섬세하게 구분했다. 이는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해석을 자발적으로, 철저히 따르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연주다.

이들의 연주는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는데, 연주 수준 자체도 그렇지만 KBS교향악단이 이런 연주도 들려줄 수 있구나 싶어서였다. 먼 옛날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상임지휘자이던 시절의 호쾌하고 강렬하지만 거칠고 투박했던 연주나, 한층 최근인 요엘 레비 시대의 기능미만 추구하던 연주와는 사뭇 달랐다.

현 상임지휘자인 피에타리 잉키넨 체제에서 KBS교향악단은 지휘자의 요구에 더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이번 공연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겠으나, 이 연주는 큰 그림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잉키넨의 스타일과도 좀 달랐다.

이 차이점은 슈만의 ‘교향곡 제2번’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곡은 특히 현악 파트를 중심으로 유난히 현란한 대목이 많고, 웅장하고 성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대목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적잖은 지휘자가 이 효과를 십분 살리려고 애쓰곤 한다. 하지만 벤자고는 눈부신 빛으로 감상자를 현혹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곡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쪽을 택했다. ‘이 곡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지휘 마리오 벤자고)과 협연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지난 2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지휘 마리오 벤자고)과 협연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평소 다소 느슨하다고 여겼던 이 곡의 짜임새가 이처럼 속속들이 알차게 들릴 수 있다니. 진정으로 음악을, 그리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해석과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는 앙코르로 연주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천둥과 번개 폴카’에서도 이런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연주 도중에 객석 쪽으로 돌아서서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그의 몸집은 즐거움과 흥이 넘쳤고, 청중 역시 여기에 자연스럽게 웃으며 동참했다.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야기의 흐름 때문에 마지막에 언급하게 됐지만, 버르토크의 협주곡에서 독주를 맡은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역시 이번 공연의 완성도에 적잖이 기여했다. 미도리는 가능한 한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 일관되게 정성스러운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오케스트라와 세심한 반주와도 멋지게 어우러졌다. 앙코르로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제3번’ 중 ‘전주곡’ 역시 아주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상쾌하고 생동감 있는 연주였다. 잊을 수 없는 밤이 이렇게 또 하나 추억에 덧붙게 되었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황진규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