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질투, 경멸, 악의, 샤덴프로이데(타인의 불행을 통쾌하게 여기는 감정)…. 철학자들은 흔히 이런 감정들을 잡초에 비유하곤 한다.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잡초를 제거해야 하듯, 잘 살기 위해선 부정적인 감정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최근 출간된 <악마와 함께 춤을>의 견해는 다르다. 크리스타 토머슨 미국 스워스모어대 철학과 교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렁이'에 빗댄다. 이들의 존재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색찬란한 꽃만큼이나 정원이 잘 가꿔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다. 저자는 "이상하고 추한 감정들은 자아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라며 "그동안 철학계는 이런 감정들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며 그 가치를 간과했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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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특정 충격에 대한 보호기제가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타인한테 무시당하면 분노는 개인의 자존감을 활성화하고 분개한 자아와 대면할 기회를 준다.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대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아존중감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본다.

토머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만, 우리보다 덜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한테 느끼는 감정'이다. 질투는 이러한 불평등을 바로잡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이다. 경멸은 자기보다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대상한테 느끼는 감정으로, 자기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자신감 회복을 도와준다고 한다.

이어 악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토머슨은 남한테 지시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악의가 표출된다고 분석한다. 악의의 핵심 기능은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이다. 저자는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며 "악의는 자기 삶의 통제권을 주장하는 한 가지 수단"이라고 말한다.
<악마와 함께 춤을>(Dancing With the Devil). 크리스타 K. 토머슨 지음, 옥스퍼드대학교.
<악마와 함께 춤을>(Dancing With the Devil). 크리스타 K. 토머슨 지음, 옥스퍼드대학교.
분노는 자존감에, 질투는 자기주장에, 악의는 자율성에 기여한다. 모두 자기관리의 방식이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에 대해 기분이 좋아지는' 얕은 수준의 자기 위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우리의 감정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표출돼야 한다. 정체된 도로에서 무리하게 끼어든 운전자한테 분노하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상대방 차량에 보복운전을 하는 게 적절하지 않듯이 말이다.

저자는 기독교와 불교 성인(聖人)들이 부정적인 감정들의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기존 종교계의 관점은 이런 식이었다. "분노는 눈과 귀를 가로막아 상호 이해 능력을 떨어뜨린다. 질투와 경멸은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후퇴시킨다. 악의는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고,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비애를 초래할 뿐이다."

이같은 지적에 저자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참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해롭지 않다고 말한다. 경멸과 샤덴프로이데는 "우리도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웃는 것"이라며 "실제로 사람들을 동류 인간과 더 가까이 교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책은 그동안 환영받지 못한 감정들의 이점을 색다른 관점에서 분석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성인들이 나쁜 감정이 초래할 수 있는 해악을 내다보고 우리에게 감정을 통제하라고 조언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물론, 최선은 부정적인 감정을 뿌리 뽑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성인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수 있다. "나쁜 감정을 피해 갈 수 없다면, 그 강점을 극대화하라"는 저자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와닿는 이유다.

정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이 글은 WSJ에 실린 앤드루 스타크의 서평(2023년 11월 27일) 'Dancing With the Devil Review: Spite, Envy and Other Virtues'를 번역·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