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국내 개봉한 영화 '어바웃타임'에서 나오는 대사로 인터넷 ‘밈(meme·유행어)’으로도 만들어지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구절이다. 배우 빌 나이는 이토록 멋진 조언을 아들에게 해주는 아버지로 등장했다. 전세계의 '국민 아버지' 빌 나이가 이번에는 영화 '리빙 : 어떤 인생'에서 노년의 공무원 윌리엄스로 분했다. 영화에서 그는 단순한 '리브'(살다)가 아닌 현재진행형 '리빙'(살아가는)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말이면 한 해를 반추하면서 신년 다이어리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더할나위없이 적절한 영화다.
영국 런던시청 공공사업부 수장인 윌리엄스는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관료다. 근엄한 표정으로 칼같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고, 새로운 부하직원이 들어와도 살가운 말 한마디 붙이지 않는다. 골치아픈 민원이 들어왔을 때 다른 부서로 떠넘기는 것도 일상다반사. 다른 부서에 떠넘길 수 있을 때까지 떠넘겨봤는데도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와버린 민원은 가장 구석에 밀어놔버린다. 부하 여직원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이 그에게 '미스터 좀비'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 어릴적 그의 꿈은 소박했다. 그저 '젠틀맨'이 되고 싶었다. 중절모를 쓰고 매일 아침 런던행 출근 열차를 타는 평범한 직장인들 말이다. 그는 자신의 꿈대로 반듯한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이 됐다. 젠틀맨다운 매너와 상식, 성실하게 모은 재산을 갖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삶을 살아왔다.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탈선하지도 않았다. 주변에서 흔히볼 수 있는 우리와 비슷한 인물인 셈이다.
그런 그가 살 날이 몇 달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는다. 충격을 받고 이제라도 인생을 즐겨보기로 한다. 결근을 하고 휴양지에서 술과 음악에 취하고, 인형 뽑기라는 소소한 도박도 해본다. 부하 직원 마거릿과 런던의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는다.
그러나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유흥과 사치는 맞지 않는 옷. 그러던 중 그는 우연한 기회로 자신이 외면했던 민원을 생각해 낸다. 구석에 미뤄놨던 민원이다. 새 놀이터 건설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청원. 그는 사무실로 복귀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처음으로 목표 기간(죽기 전)이 생기고 최대한 빨리, 최선을 다해 놀이터를 만들도록 한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한부라는 설정은 다소 뻔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는 1952년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이키루'(살다)를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교훈적인 스토리와 이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대사, 시한부 설정 때문에 전형적이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윌리엄스 원톱으로 돌아가는 이 영화는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 덕분에 진부한 영화가 아닌 클래식한 영화로 둔갑한다. 빌 나이는 주름살 하나, 입꼬리 근육 하나까지 섬세하게 연기하며 영혼없는 노년기 관료를 표현했다. 생의 막바지에 작은 모험을 떠나고, 원하는 삶의 엔딩을 이뤄내는 좀비 아저씨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끌어낸다. 카메라는 잦은 클로즈업으로 그의 섬세한 표정과 눈빛을 담아내며 관객을 윌리엄스에게 빙의시킨다.
여기에 영화 '캐롤' 제작인이 투입돼 시종일관 세련된 미감을 보여준다. 2016년 국내 상영된 캐롤은 1950년대 뉴욕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당시 빼어난 영상미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도 동화같이 아련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옛날사진 같은 질감으로 런던의 정경을 담은 오프닝부터 눈발이 서리며 마무리되는 윌리엄스의 마지막 장면까지, 본석같은 장면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시대의 클래식한 의상과 소품 또한 볼거리다.
감독은 올리버 허머너스, 각본은 가즈오 이시구로. 12월 13일 개봉. 상영 시간은 102분.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