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의 장막' 연 美 탈냉전 설계자…100세 키신저 별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가장 강력했던 美국무장관
대통령 12명에 외교 조언
국가안보보좌관·장관 겸임하며
미·중 수교, 미·소 데탕트 이끌어
노벨평화상 받았지만 전범 비판도
아산정책硏 "한국인의 평생 친구
그의 현명한 조언 기억할 것" 애도
대통령 12명에 외교 조언
국가안보보좌관·장관 겸임하며
미·중 수교, 미·소 데탕트 이끌어
노벨평화상 받았지만 전범 비판도
아산정책硏 "한국인의 평생 친구
그의 현명한 조언 기억할 것" 애도
미·중 수교와 미·소 데탕트(긴장 완화) 노선을 추진해 탈냉전의 초석을 놓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세상을 떴다. 향년 100세.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 컨설팅사인 키신저어소시에이츠는 이날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유대인 출신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역 후 1950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 재임(1974~1977년) 시절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임했다.
그는 베트남전으로 인해 미국 내 반전 여론이 확산하자 옛 소련과 갈등을 풀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1969년 옛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 협정을 타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핑퐁 외교’로 미·중 수교에도 기여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중국 측과 접촉한 뒤 그해 4월 미국 탁구 대표팀의 중국 방문 경기를 성사시켜 양국 수교의 발판을 닦았다. 중국의 고립정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죽(竹)의 장막’을 걷어낸 공로 등을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도 관여했다. 그는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독자 핵무기 개발 추진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신 같은 해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한국을 자주 찾아 노태우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6명의 한국 대통령을 만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7년 국무장관을 그만둔 뒤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세계질서(World Order)> <중국 이야기(On China)> <디플로머시(Diplomacy)>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100세가 된 올해도 집필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미국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아버지의 장수 비결로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꼽았다.
그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 미국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이미지 쇄신을 위해 키신저를 찾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인권단체로부터 ‘전범’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3년 당시 노벨평화상 심사위원 두 명은 베트남전 휴전 협상 중 하노이에 폭격을 명령한 키신저 전 장관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장관 재직 시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설로 곤경에 처하자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 전 장관은 전후 가장 강력한 국무장관으로서 추앙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고 전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30일 키신저 전 장관 별세를 애도하는 추모사를 발표했다. 연구원은 “키신저 전 장관은 한국인의 평생 친구였다”며 “우리는 그분의 현명한 조언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전쟁 발발 과정을 분석한 키신저 전 장관의 보고서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는 데 기초가 됐다”며 “키신저 전 장관의 열정과 통찰력을 후학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 컨설팅사인 키신저어소시에이츠는 이날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유대인 출신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역 후 1950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 재임(1974~1977년) 시절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임했다.
그는 베트남전으로 인해 미국 내 반전 여론이 확산하자 옛 소련과 갈등을 풀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1969년 옛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 협정을 타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핑퐁 외교’로 미·중 수교에도 기여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중국 측과 접촉한 뒤 그해 4월 미국 탁구 대표팀의 중국 방문 경기를 성사시켜 양국 수교의 발판을 닦았다. 중국의 고립정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죽(竹)의 장막’을 걷어낸 공로 등을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도 관여했다. 그는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독자 핵무기 개발 추진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신 같은 해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한국을 자주 찾아 노태우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6명의 한국 대통령을 만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7년 국무장관을 그만둔 뒤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세계질서(World Order)> <중국 이야기(On China)> <디플로머시(Diplomacy)> 등 10여 권의 책을 썼다. 100세가 된 올해도 집필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미국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아버지의 장수 비결로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꼽았다.
그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 미국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후보 시절 이미지 쇄신을 위해 키신저를 찾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인권단체로부터 ‘전범’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3년 당시 노벨평화상 심사위원 두 명은 베트남전 휴전 협상 중 하노이에 폭격을 명령한 키신저 전 장관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장관 재직 시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설로 곤경에 처하자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 전 장관은 전후 가장 강력한 국무장관으로서 추앙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고 전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30일 키신저 전 장관 별세를 애도하는 추모사를 발표했다. 연구원은 “키신저 전 장관은 한국인의 평생 친구였다”며 “우리는 그분의 현명한 조언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전쟁 발발 과정을 분석한 키신저 전 장관의 보고서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는 데 기초가 됐다”며 “키신저 전 장관의 열정과 통찰력을 후학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