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제는 서울을 2배로 키웠다…영등포 신촌까지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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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경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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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의 종착역은 신의주가 아닙니다. 압록강을 건너 모스크바를 지나 파리와 런던까지 이어집니다.'
국정홍보처의 경의선 홍보문구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지만, 경의중앙선이라 부르는 이 철길은 문산을 지나 도라산역까지만 운행한다.
의주까지 도보로 가는 길은 ‘1080리’ 경의대로인 의주로가 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고 우리나라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중국에 갔다. 그래서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1번 국도’ 였다. 길을 따라 왜병이 북상한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조선시대에는 인공적인 길 조성을 꺼렸다. 그러나 중국으로 오가는 이 길은 늘 정비를 해서 통행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철길’ 경의선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만든 길이 아니다.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해 설계한 길이다. 러일전쟁은 경의선 부설 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이 철길의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철길이 일본제국주의 확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경의선 철도의 가설 비용은 일본의 40% 수준이었다. 조선 사람을 마구잡이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하다 보니 돈이 덜 들었다. 선로 가설을 위한 자재를 나르기 위해 소들을 죄다 끌고 갔다. 철길 주변에 빈집이 넘쳐났던 것은 일본의 강제적 동원을 피해 이사 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름이면 우리나라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망초 꽃도 이때 들어왔다. 나라가 망할 무렵에 들어왔다고 하여 망할 망(亡)자가 들어간 ‘개망초’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다. 일본이 철로에 까는 침목을 놓기 위해 미국에서 나무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 나무에 꽃씨가 묻어왔다.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꽃씨가 묻어갔다. 그래서 개망초는 어디서든 피어났다. 사람과 가축은 죽어 없어져도 개망초는 지천으로 넘쳤다. 개망초의 향기로운 꽃 냄새를 맡으면 이 침목을 깔기 위해 우리 민초들이 얼마나 죽었나를 생각할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만주로 갔다. 일본의 수탈로 가난해진 민초들,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무작정 떠났다. 1919년 11월, 3.1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 무렵, 이 길 위에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년)이 서 있었다.
의친왕 이강은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명성황후가 낳은 순종보다 세 살 어리다. 나라는 망했지만 왕조는 이어졌다. 누군가는 순종의 뒤를 이어야 했다. 영친왕을 순종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순헌황귀비의 견제로 오랫동안 외국에 체류하다 귀국했지만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술과 여자로 시대를 허비했다. 공인된 자녀만 해도 12남 9녀에 이르러 주색잡기에서는 조선팔도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따라다닌다. 이토히로부미의 면전에 오줌을 갈겼다든지, 데라우치 총독에게 권총을 겨누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다. 사실관계를 떠나 조선의 백성이 그를 통해 나라 잃은 울분을 대리만족 하려는 의도가 이야기를 부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유별났다. ‘독립된 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독립신문의 기사(1919년 11월 20일자)가 눈에 뜨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 무렵, 이미 임시정부에 망명한 대한제국의 대신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년)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임정에 합류하기를 권했다. 그는 고양군 삼각산 아래 외딴집에 은신했다가 1919년 11월 11일 오후 5시 경의선 수색정거장에서 경의선 봉천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친왕 이강은 경의선을 타고 봉천역에서 내려 배를 타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의친왕의 일거수 일거족은 이미 일본 경찰의 레이다망 안에 있었다. 압록강 철교를 넘어 한숨을 돌릴 무렵, 일본 경찰은 단동현 정거장에서 그를 체포한다.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면 김구 주석을 비롯해서 풍찬노숙을 일삼았던 임정 요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로부터 17년 후인 1936년, 만리동 언저리의 양정고보 출신 손기정도 경의선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까지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자. 일단 동경에서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기차로 갔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225km인데 배를 타고 이동한다. 관부연락선이다. 시모노세키의 한자어인 하관에서 관(關)자와 부산의 첫 음, 부(釜)자를 딴 것이다. 부산에서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되고 1908년에는 경부선에 경의선을 연결한 경부.경의선이 개통됐다. 이걸 타고 만주로 갔다. 이미 1911년 압록강 철교가 만들어져 하얼빈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6월 4일 도쿄를 출발해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을 지나 신의주, 단둥, 봉천, 하얼빈까지 간 것이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하얼빈을 점령했고, 이곳은 유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베를린까지 간 것이다. 긴 시간이었다. 7월 17일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에 도착했다. 지금도 당시에 손기정 선수가 사용한 기차표가 보관돼 있다. 손기정은 기차가 정차하는 곳마다 내려서 몸을 풀었다.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이용했다. 이미 일장기말소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들뜬 뒤였다. 일제는 환영 행사를 통해 민족혼을 깨우는게 두려웠다. 사실 손기정이 베를린으로 가기 전 경의선 철길은 한 번 더 진화하게 된다. 1930년대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안정화로 접어들면서 서울이 두 배로 확장됐다. 이른바 '대 경성'이다. 1936년 영등포, 신촌, 돈암동 등이 서울로 편입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대중교통은 한계였다. 기존의 철길을 이리저리 연결하니 새로운 길이 탄생했다. 당초의 경의선 구간, 용산에서 수색으로 가는 길(용산선)과 1919년 사대문 안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경성-수색간 철길을 연결하니 서울은 철길이 둘러싸인 도시가 되었다. 이른바 '경성 순환열차'의 탄생이다. 지금의 ‘경의 중앙선'과 철길 위로 카페거리가 조성된 ’없어진 경의선 철길‘을 연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신촌과 아현의 인구 증가와 연희전문학교의 통근 수요를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방안이었다. 이 열차는 통학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시민들이 사용했지만, 주말에는 서울 인근으로 놀러 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경의선, 지금은 마치 철 지난 곡마단의 서커스처럼 아련하게 보일지라도 여기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회한이 스며있다. 언제쯤 이 철길을 따라 신의주까지, 아니 손기정처럼 유럽까지 갈 수 있을까. 경의선 땡땡거리는 기차 소리에 생각은 저 멀리 유럽까지 간다.
의주까지 도보로 가는 길은 ‘1080리’ 경의대로인 의주로가 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고 우리나라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중국에 갔다. 그래서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1번 국도’ 였다. 길을 따라 왜병이 북상한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조선시대에는 인공적인 길 조성을 꺼렸다. 그러나 중국으로 오가는 이 길은 늘 정비를 해서 통행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철길’ 경의선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만든 길이 아니다.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해 설계한 길이다. 러일전쟁은 경의선 부설 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이 철길의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철길이 일본제국주의 확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경의선 철도의 가설 비용은 일본의 40% 수준이었다. 조선 사람을 마구잡이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하다 보니 돈이 덜 들었다. 선로 가설을 위한 자재를 나르기 위해 소들을 죄다 끌고 갔다. 철길 주변에 빈집이 넘쳐났던 것은 일본의 강제적 동원을 피해 이사 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여름이면 우리나라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망초 꽃도 이때 들어왔다. 나라가 망할 무렵에 들어왔다고 하여 망할 망(亡)자가 들어간 ‘개망초’의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다. 일본이 철로에 까는 침목을 놓기 위해 미국에서 나무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 나무에 꽃씨가 묻어왔다.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꽃씨가 묻어갔다. 그래서 개망초는 어디서든 피어났다. 사람과 가축은 죽어 없어져도 개망초는 지천으로 넘쳤다. 개망초의 향기로운 꽃 냄새를 맡으면 이 침목을 깔기 위해 우리 민초들이 얼마나 죽었나를 생각할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만주로 갔다. 일본의 수탈로 가난해진 민초들,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무작정 떠났다. 1919년 11월, 3.1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 무렵, 이 길 위에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년)이 서 있었다.
의친왕 이강은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명성황후가 낳은 순종보다 세 살 어리다. 나라는 망했지만 왕조는 이어졌다. 누군가는 순종의 뒤를 이어야 했다. 영친왕을 순종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순헌황귀비의 견제로 오랫동안 외국에 체류하다 귀국했지만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술과 여자로 시대를 허비했다. 공인된 자녀만 해도 12남 9녀에 이르러 주색잡기에서는 조선팔도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따라다닌다. 이토히로부미의 면전에 오줌을 갈겼다든지, 데라우치 총독에게 권총을 겨누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다. 사실관계를 떠나 조선의 백성이 그를 통해 나라 잃은 울분을 대리만족 하려는 의도가 이야기를 부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유별났다. ‘독립된 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독립신문의 기사(1919년 11월 20일자)가 눈에 뜨인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 무렵, 이미 임시정부에 망명한 대한제국의 대신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년)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임정에 합류하기를 권했다. 그는 고양군 삼각산 아래 외딴집에 은신했다가 1919년 11월 11일 오후 5시 경의선 수색정거장에서 경의선 봉천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친왕 이강은 경의선을 타고 봉천역에서 내려 배를 타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의친왕의 일거수 일거족은 이미 일본 경찰의 레이다망 안에 있었다. 압록강 철교를 넘어 한숨을 돌릴 무렵, 일본 경찰은 단동현 정거장에서 그를 체포한다.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면 김구 주석을 비롯해서 풍찬노숙을 일삼았던 임정 요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로부터 17년 후인 1936년, 만리동 언저리의 양정고보 출신 손기정도 경의선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까지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자. 일단 동경에서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기차로 갔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225km인데 배를 타고 이동한다. 관부연락선이다. 시모노세키의 한자어인 하관에서 관(關)자와 부산의 첫 음, 부(釜)자를 딴 것이다. 부산에서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되고 1908년에는 경부선에 경의선을 연결한 경부.경의선이 개통됐다. 이걸 타고 만주로 갔다. 이미 1911년 압록강 철교가 만들어져 하얼빈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6월 4일 도쿄를 출발해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을 지나 신의주, 단둥, 봉천, 하얼빈까지 간 것이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하얼빈을 점령했고, 이곳은 유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베를린까지 간 것이다. 긴 시간이었다. 7월 17일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에 도착했다. 지금도 당시에 손기정 선수가 사용한 기차표가 보관돼 있다. 손기정은 기차가 정차하는 곳마다 내려서 몸을 풀었다.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이용했다. 이미 일장기말소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들뜬 뒤였다. 일제는 환영 행사를 통해 민족혼을 깨우는게 두려웠다. 사실 손기정이 베를린으로 가기 전 경의선 철길은 한 번 더 진화하게 된다. 1930년대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안정화로 접어들면서 서울이 두 배로 확장됐다. 이른바 '대 경성'이다. 1936년 영등포, 신촌, 돈암동 등이 서울로 편입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대중교통은 한계였다. 기존의 철길을 이리저리 연결하니 새로운 길이 탄생했다. 당초의 경의선 구간, 용산에서 수색으로 가는 길(용산선)과 1919년 사대문 안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경성-수색간 철길을 연결하니 서울은 철길이 둘러싸인 도시가 되었다. 이른바 '경성 순환열차'의 탄생이다. 지금의 ‘경의 중앙선'과 철길 위로 카페거리가 조성된 ’없어진 경의선 철길‘을 연결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신촌과 아현의 인구 증가와 연희전문학교의 통근 수요를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방안이었다. 이 열차는 통학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시민들이 사용했지만, 주말에는 서울 인근으로 놀러 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경의선, 지금은 마치 철 지난 곡마단의 서커스처럼 아련하게 보일지라도 여기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회한이 스며있다. 언제쯤 이 철길을 따라 신의주까지, 아니 손기정처럼 유럽까지 갈 수 있을까. 경의선 땡땡거리는 기차 소리에 생각은 저 멀리 유럽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