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자판에 얽힌 오묘한 역사…신간 '한글과 타자기'
스마트폰 메신저로 주로 대화를 주고받는 세대들에게 세벌식 타자기라는 말은 생소하다.

한글이 오늘날의 개인용 컴퓨터(PC) 키보드 자판에 정착하기까지 어떠한 역사가 있었을까.

지금은 PC와 스마트폰에 한글을 입력하는 데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디지털기기에 한글을 입력하는 한글 기계화의 역사는 결코 매끈하지 못했다.

30년째 세벌식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 김태호 교수가 신간 '한글과 타자기'에서 오늘날의 한글 자판이 있었기까지의 숱한 굴곡과 분기점이 된 역사를 소개한다.

타자기는 1860년대 미국에서 잉크 리본을 이용해 만든 것이 상용화한 이래 서구사회에 급속하게 대중화했다.

타자기가 제국주의시대 서구 행정의 강대함을 이루는 비결 중 하나로 인식한 동아시아권 국가들은 로마자(字) 타자기를 자국의 문자와 접목하고자 노력했다.

키보드 자판에 얽힌 오묘한 역사…신간 '한글과 타자기'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은 한자 문화를 포기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은 1910년대 이후부터 타자기가 태동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24개의 자음과 모음을 26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로마자 타자기에 이식하는 작업은 한글의 '모아쓰기' 특성 때문에 만만하지 않았다.

초성·중성·종성이 모여 하나의 음절 글자를 만드는 한글의 특성을 모듈화하는 기술적인 난제가 있었다.

세로쓰기와 한자 혼용 쓰기 문화가 1960년대까지 당연했던 시대 상황에서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 가로쓰기하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9년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인 공병우 박사가 내놓은 세벌식 타자기가 본격적인 한글 타자기의 시대를 열었다.

세벌식은 한글 창제 원리에도 맞는다고 평가받으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들쭉날쭉한 글자꼴이 마음에 안 드는 이용자들은 가지런한 모양을 원했다.

세벌식은 쌍자음 글쇠를 따로 두지 않아 쌍자음이 들어간 음절 글자는 옆으로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음절 글자들이 윗줄을 따라 정렬되고 받침이 있으면 그만큼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마치 빨랫줄에 옷을 널어놓은 모양처럼 보인다고 해서 '빨랫줄' 글꼴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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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동훈(5벌식), 백성죽(4벌식) 등 발명가들이 고유의 자판 배열을 갖춘 한글 기계들을 시장에 선보여 시장에 병존했다.

1969년 정부가 세벌식 자판을 금지하고, 네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하자 공병우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정부가 두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특정 자판의 우수성을 감별하지는 않은 채 표준이 되지 못하고 잊힌 자판들의 특징과 개성을 그리는 데 주목했다.

한글의 기계화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정보화 시대에 따르는 몇몇 문제들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통신기기의 발전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글자판이 등장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현대의 스마트 기기들은 텍스트 예측 기술을 이용해 사용자들의 언어 패턴을 익히고 자주 쓰는 표현을 제안해준다.

이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 글쇠를 눌러 타자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이를 적극 활용한 새로운 정보통신기기가 등장하면 우리가 아는 글자판이 달려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니코드 안에 아직 남북한의 글자가 통일되지 않은 점 등도 한반도의 통일을 앞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전망한다.

역사비평사.320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