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을 자극하는 미술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안드레아 페레로가 만든 먹을 수 있는 초콜릿 조각(미각).  갤러리신라 제공
오감을 자극하는 미술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안드레아 페레로가 만든 먹을 수 있는 초콜릿 조각(미각). 갤러리신라 제공
미술에 푹 빠진 사람들은 날 좋고 볕 좋은 봄·가을만큼이나 겨울을 사랑한다. 봄·가을에는 주로 대중이 좋아할 만한 전시를 여는 갤러리들이 ‘겨울 비수기’가 오면 앞다퉈 예술성 있는 유망 작가들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열리는 전시에는 각 화랑의 색깔과 내공, 미술계 최신 조류 등이 뚜렷이 드러나 ‘보는 맛’이 있다고 애호가들은 말한다. 연말에는 영화관·공연장을 찾는 사람이 늘어 전시장이 한적해지는 것도 겨울만의 장점이다.

올 연말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전시가 특히 눈에 띈다. 작품을 실제 조각내서 먹는 전시(갤러리신라)부터 음악을 듣고 향기를 맡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작품전(BHAK갤러리), 사람의 신체와 촉각을 주제로 꾸민 전시(지갤러리)가 열리고 있다.

○씹고 맛보고 즐기는 현대미술

전시 전경. 갤러리신라 제공
전시 전경. 갤러리신라 제공
서울 삼청동 갤러리신라에서는 멕시코 작가 안드레아 페레로(32)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그리스·로마 시대 신전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흰색과 분홍색 조각이 가득 널려 있다. 얼핏 보면 대리석이지만, 실제로는 화이트초콜릿이다. 이준엽 디렉터는 “국내 첫 식용 조각 전시”라고 설명했다.

페레로가 이렇게 특이한 작품을 선보인 이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의 고향은 멕시코. 16세기 스페인에 정복당해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다. 현대 멕시코의 인종과 언어(스페인어), 종교(가톨릭) 등에 스페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이유다. 독립한 지 200년이 넘었지만 멕시코는 지금도 경제·문화적으로 미국과 유럽 영향권에 있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서양 문화를 이겨내는 일종의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근본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산을 초콜릿으로 만들어 먹어 치우는 작품을 구상한 것이다.
갤러리에서 150달러 상당의 상자를 구입하면 사진처럼 작품 일부를 담아갈 수 있다. 갤러리신라 제공
갤러리에서 150달러 상당의 상자를 구입하면 사진처럼 작품 일부를 담아갈 수 있다. 갤러리신라 제공
작품을 부수는 도구. 갤러리신라 제공
작품을 부수는 도구. 갤러리신라 제공
이 전시는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미국 뉴욕 스위벨갤러리에서 똑같은 이름과 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나온 작품들은 한국 전시를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하지만 150달러(약 18만원)를 내면 전시장에서 주는 도구로 직접 초콜릿 조각을 부순 뒤 상자에 가득 담아갈 수 있다. 이 디렉터는 “관객들이 다 같이 작품을 먹고 소화한 뒤 배설하며 현대미술의 참신함을 되새겨볼 수 있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전시 폐막일과 초콜릿 작품의 ‘유통기한’ 모두 오는 27일까지다.

○시각·촉각·청각·후각…‘감각의 향연’

지갤러리 전시 전경. 몽환적인 회화는 최윤희, 독특한 모양의 종이 조각은 황수연의 작품이다. 지갤러리 제공
지갤러리 전시 전경. 몽환적인 회화는 최윤희, 독특한 모양의 종이 조각은 황수연의 작품이다. 지갤러리 제공
서울 청담동 지갤러리에서는 최윤희 작가(37)와 황수연 작가(42)의 2인전 ‘두꺼운 피부’가 열리고 있다. 두 작가 모두 각종 젊은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선정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망 작가다. 이들은 전시장에 ‘몸과 피부’를 주제로 한 작품을 들고나왔다. 추상화가인 최 작가는 아지랑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몽환적인 추상화를 내놨다. 최 작가는 “숨을 들이쉬면서 몸 안으로 들어온 공기가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황 작가는 몸의 바깥쪽인 피부에 집중한다. 황 작가가 종이로 제작한 조각은 직선과 곡선이 뒤섞인 독특한 모양이다. 질감도 특이하다. 설명을 듣지 않고 그냥 보면 쇠나 돌로 만들었다고 착각할 정도다. 황 작가는 “모양과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재단용 곡선자와 페인트 등 여러 재료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세균과 같은 외부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강력한 방패’인 동시에 쉽게 상처 입는 피부의 이중성을 작품으로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전시는 23일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미술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연누리 작가의 설치 작품(청각·후각). BHAK 제공
오감을 자극하는 미술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연누리 작가의 설치 작품(청각·후각). BHAK 제공
서울 한남동 BHAK갤러리에서는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상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연누리 작가(39)의 개인전 ‘헤일로’가 대표적이다. 관객들은 연누리가 오디오 스피커 부품을 이용해 만든 설치 작품을 직접 만지고 작동시켜볼 수 있다. 박종혁 대표는 “관객이 원하는 음악을 직접 골라 감상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건 작품에서 나오는 음악뿐만이 아니다. 관람객은 흙과 나무의 느낌이 섞인 이 전시장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갤러리가 작품 감상을 돕기 위해 3월 전문 조향사와 함께 개발한 향 ‘Sol’이다. 향이 특히 잘 어울리는 곳은 지하에 자리 잡은 순재 작가(31)의 개인전. 이곳에서는 작가가 오방색을 가미해 그린 신작을 만날 수 있다. 23일까지 향과 그림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