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 시각장애' 화가 솔라노 “차라리 축복이란 생각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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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프로젝트서 개인전 여는 마뉴엘 솔라노 인터뷰
시각 장애 갖고 있는 트랜스젠더 화가
시각 대신 촉각에 의존해 그림 그려
"냉혹한 현실에 절망할 때 있었지만
나를 살아가게 한 것도 현실"
시각 장애 갖고 있는 트랜스젠더 화가
시각 대신 촉각에 의존해 그림 그려
"냉혹한 현실에 절망할 때 있었지만
나를 살아가게 한 것도 현실"
지난달 30일 서울 사간동 페레스프로젝트 갤러리. 한 여성이 무릎을 끓은 채 아이들이 갖고 놀 법한 블럭을 조심스럽게 쌓았다. 큼지막한 블럭부터 새끼 손톱만한 작은 블럭까지, 차례대로 블럭을 쌓는 모습을 사람들은 숨 죽이며 지켜봤다.
평범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건 그가 시각장애인이기 때문. 주인공은 멕시코 출신 예술가 마뉴엘 솔라노(36)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여자의 삶을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다. 26세 때 에이즈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회화, 비디오,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린다는 걸까. 정말 자기가 그린 게 맞을까. 그가 페레스프로젝트에서 한국 첫 개인전 '파자마'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러 궁금증이 떠올랐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 만난 솔라노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운을 띄우며 묻자,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많이들 물어보곤 해요. 전 조수들과 함께 일해요.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설명하면 조수들이 캔버스 위에 못과 핀, 줄을 놓죠. 그러고 나면 제가 손가락으로 그 위를 따라서 그림을 그려요. 시각 대신 촉각에 의존해서 작품을 만드는 거죠." 이번 전시의 주제는 솔라노의 어린 시절이다. 파자마를 입고 뛰놀거나, 친구와 귀여운 입맞춤을 하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렸다. 특히 사탕이 들어있는 인형을 두들겨서 깨는 멕시코 전통놀이 '피냐타' 장면을 그린 '빅 버드'(2023)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렸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이가 입고 있는 털옷과 인형의 재질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달랐어요.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부끄러움이 많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넘쳤죠. '난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은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그런 제 감정과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예술이었죠."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는 시력을 잃으면서 더 커졌다. "처음엔 제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치 장난처럼 느껴졌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현실을 직시하고 나선 삶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예술이 더 간절해졌죠. 내가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력을 잃기 전 사실적인 회화를 주로 그렸던 그는 "붓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면서 본능과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솔라노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다소 투박하지만,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진다. 그는 "어떤 예술가들에겐 우울이 영감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행복한 상태에서 더욱 영감을 많이 받는다"며 "그래서 항상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면서 행복감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솔라노가 그린 그림은 한없이 밝지만, 장애인과 트랜스젠더로서 그가 걸어온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작고 마른 몸의 그가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냉혹한 현실이었을 테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솔라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나온 대답. "결코 쉽지는 않았어요. 혹독한 현실에 차라리 눈이 안 보이는 게 차라리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절 버티게 해준 것도 현실이었어요.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가족과 친구, 제게 힘을 주는 동료 예술가들이요. 그들이 있었기에 제가 보통의 사람으로, 가장 평등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시는 내년 1월 14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평범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건 그가 시각장애인이기 때문. 주인공은 멕시코 출신 예술가 마뉴엘 솔라노(36)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여자의 삶을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다. 26세 때 에이즈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회화, 비디오,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린다는 걸까. 정말 자기가 그린 게 맞을까. 그가 페레스프로젝트에서 한국 첫 개인전 '파자마'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러 궁금증이 떠올랐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 만난 솔라노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운을 띄우며 묻자,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많이들 물어보곤 해요. 전 조수들과 함께 일해요.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설명하면 조수들이 캔버스 위에 못과 핀, 줄을 놓죠. 그러고 나면 제가 손가락으로 그 위를 따라서 그림을 그려요. 시각 대신 촉각에 의존해서 작품을 만드는 거죠." 이번 전시의 주제는 솔라노의 어린 시절이다. 파자마를 입고 뛰놀거나, 친구와 귀여운 입맞춤을 하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렸다. 특히 사탕이 들어있는 인형을 두들겨서 깨는 멕시코 전통놀이 '피냐타' 장면을 그린 '빅 버드'(2023)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렸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이가 입고 있는 털옷과 인형의 재질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달랐어요.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부끄러움이 많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넘쳤죠. '난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은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그런 제 감정과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예술이었죠."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는 시력을 잃으면서 더 커졌다. "처음엔 제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치 장난처럼 느껴졌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현실을 직시하고 나선 삶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예술이 더 간절해졌죠. 내가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력을 잃기 전 사실적인 회화를 주로 그렸던 그는 "붓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면서 본능과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솔라노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다소 투박하지만,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진다. 그는 "어떤 예술가들에겐 우울이 영감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행복한 상태에서 더욱 영감을 많이 받는다"며 "그래서 항상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면서 행복감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솔라노가 그린 그림은 한없이 밝지만, 장애인과 트랜스젠더로서 그가 걸어온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작고 마른 몸의 그가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냉혹한 현실이었을 테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솔라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나온 대답. "결코 쉽지는 않았어요. 혹독한 현실에 차라리 눈이 안 보이는 게 차라리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절 버티게 해준 것도 현실이었어요.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가족과 친구, 제게 힘을 주는 동료 예술가들이요. 그들이 있었기에 제가 보통의 사람으로, 가장 평등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시는 내년 1월 14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