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둘은 부부일까, 부부인 척 역할놀이를 한 걸까
민예은 작가의 ‘뭉쳐지지 않는 덩어리’ 전에서 만난 한 작품(사진)에 눈길이 갔다. 언뜻 보기엔 똑같은 오브제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릴 적 자주 한 ‘다른 그림 찾기’처럼 자잘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작가는 이 두 오브제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걸까?

오른쪽 작품은 작가가 태어났을 때 집에 있던 접시다. 당연히 작가는 그 접시와 친숙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작가는 프랑스의 한 벼룩시장에서 ‘똑같은’(이라고 생각한) 접시를 발견하고 사들였다. 그런데 집에 있는 접시와 나란히 놓고 보니, ‘어라, 다른 접시네!’ 민 작가는 그렇게 비슷하지만 시간과 장소, 태생이 완전히 다른 두 오브제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보편성과 개별성에 대해 말한다.
[아르떼 칼럼] 둘은 부부일까, 부부인 척 역할놀이를 한 걸까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Certified Copy)가 떠올랐다. 영국 작가인 남자는 자신의 소설 <기막힌 복제품>이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자 강연을 위해 이탈리아로 간다. 강연장에서 만난 여자는 그의 팬이라며, 돌아갈 때까지 마을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돌아다니며 예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 순간 관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려고 들른 카페의 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착각한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부부인 듯 아닌 듯 묘한 태도를 취한다. 영화의 마지막,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알리는 종탑의 종소리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은 채 거울을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두 사람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실제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숱한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두 사람이 마주친 순간부터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를 변주해낸다. 작가의 책 제목부터가 <기막힌 복제품>이 아니던가. 두 사람이 함께 본 다비드상 또한 그런 논란의 한 자락이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보던 조각상. 어린 아들은 그 조각을 보고 경외심을 느끼지만 그 조각상은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조각상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들의 경외심은 사라지는 것일까.

카페를 나오면서 남녀의 관계는 상당히 모호해지는데, 이후 대화를 보면 실제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진다. 진짜 부부인지, 부부인 척 역할놀이를 하는 건지.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은 부부인 척하면서 남모를 고민을 서로에게 털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부부라고 하기에는 영화 속에 거울과 유리 등 반사체가 너무나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거울이나 유리는 본체나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체리향기’로 이어지는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은 ‘영화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그의 영화엔 현장에서 섭외한 비전문 배우가 많이 나온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은 실제와 허구를 넘나든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말한다. 영화는 우리 인생의 복제품이라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어쩌면 진실과 거짓을 나누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오리지널리티는 의미가 있다. 원작의 독창성도 존중받아야 한다.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누군가 만들어낸 정체성의 본질은 다른 사람이 쉽게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