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적십자병원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뢰할 수 있는 병원입니다.' 서울 적십자병원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이다.
허망하게 죽은 시인
병원이 국민들에게 늘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 1957년 출간된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자식을 잃은 지영(박경리 자신)이 병원과 사찰에 대해 실망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스님은 시주받은 공양미를 마을 사람들에게 되팔아 이익을 챙긴다. 쌀을 더 가져가려는 주민들과 흥정하면서 연신 "이래서 중이 살갔수?"를 외친다.

병원에서는 주사기의 함량을 속이고 환자를 건성으로 돌본다. 넘어져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아들의 엑스레이 한 장 찍지 않고 마취도 없이 수술대에 올린다. 지영은 허망하게 아들 문수를 잃는다. 부도덕한 사찰의 행태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결국 지영은 절에서 아들의 위패를 들고 나와 불을 질러 버린다. 어디를 가도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다. 박경리가 소설에서 말한 불신시대는 가장 깨끗하고 신뢰해야 할 병원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되었다.
1955년 적십자병원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지원한 엑스레이 장비로 첫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모습.
1955년 적십자병원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지원한 엑스레이 장비로 첫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모습.
서울 적십자병원은 정말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뢰할 수 있는 병원일까? 적십자 병원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적십자의 정신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적십자 역사는1903년 대한제국이 제네바협약에 가입하면서 부터이다. 1905년에는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적십자병원이 발족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적십자 역사도 무척 오래됐다. 프랑스에서 적십자가 창설된지 불과 40여 년 만에 우리나라에도 적십자 병원이 설립된 것이다. 스위스의 사업가 앙리 뒤냥에 의해 창설된 적십자는 1859년 프랑스, 오스트리아군 사이 ‘솔페리노 전투’의 참혹한 전투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카스틸료네 마을에서 아군 적군 차별 없이 전상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이것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적십자사가 국제적인 조직으로 만들어 진다. 핵심적인 가치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념적으로 편들지 않는 것이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광주 적십자병원이 나온다.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온몸을 바쳐 치료하는 의사, 간호사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적십자병원을 찾는 이유는 적십자의 정신 때문만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치료비가 적게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가난한 예술가들이 마지막으로 이 병원을 택했다. 50년대, 60년대, 그들은 이곳에서 쓸쓸하고 허망하게 죽어갔다. 화가 이중섭, 시인 김수영이 그랬다.
시인 김수영
시인 김수영
이중섭과 김수영의 작품도 우리를 매료시키지만, 시대와 불화했던 그들의 삶과 진실을 좇아 방황했던 궤적도 우리 문화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멋 모르던 나의 중학생 시절, 전쟁과 가난, 인간 굴종의 시대에 일본으로 떠날수 밖에 없었던 아내를 못 잊는 화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담임이 미술 선생님이라서 곧잘 우리에게 화가 이야기를 해주셨다. 종이가 없어 담뱃갑을 싼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중섭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시려왔다.

대학 시절, 1980년대 웬만한 학생의 가방에서도 김수영의 시편이 발견되곤 했다. 어느 시대든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난과 시대의 아이러니에 신음하던 김수영은 허망하게 이곳에서 죽었다. 그가 적십자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933년, 어의동 보통학교에 다닐 때 가을 운동회가 끝나고 밤에 열이 불같이 오르고 정신을 잃은 채 헛소리를 했다. 가족들이 어린 김수영을 업고 찾아간 곳이 적십자병원이다. 급성 장티프스로 진단 받았으나 폐렴과 뇌 수막염까지 겹쳤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1968년 발생한 교통사고는 피해 가지 못했다.

김수영은 1968년 6월15일 청진동 곱창집에서 신구문화사 편집장이자 시인 신동문, 소설가 이병주, 한국일보 문화부 정달영 기자와 술을 마셨다. 소주 몇 순배에 취기가 올랐다. 이 때 성격 까칠한 김수영은 이병주의 지적 자만이 넘쳐 흐르는 이야기가 거슬려 시비를 걸었다. 신동문은 돌아가고 무교동 술집 ‘발렌틴’에서 맥주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볼보 승용차로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이병주의 호의를 거절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를 거쳐 서강까지 종점에 내린 것은 밤 11시 30분, 버스 두 대가 엇갈리며 달려가다 한 대가 인도로 뛰어들면서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 받았다.(최하림, 김수영평전, 374~375p). 그의 집이 있는 마포 구수동은 닭을 750마리나 기를 정도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농촌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내 김현경은 남편이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 적십자 병원에 갔으나 이미 산소 호흡기를 낀 상태였다. 6월 16일 8시 의사가 산소 호흡기를 벗겼다. 불과 사흘 전 김수영과 누이 김수명과 함께 술을 마셨던 홍사중의 말이다. “어느 장소든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삶의 끝, 죽음의 한 치 앞까지 몰리고서도 기적적으로 생환해 왔던 김수영도 그 장소가 주는 삶의 아이러니를 피해 가지 못했다.”

국가불행시인행(國家不幸詩人幸)이라는 중국의 고사가 있다. 국가가 불행할 때 시인은 그 속에서 시의 영감과 소재를 찾아 최대의 창작 혼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살아왔던 학병세대, 좌우의 이념 대립, 6.25 전쟁, 인민군시절, 포로, 4.19 혁명, 5.16정변 등등 나열하기조차 버거운 시대상황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어디 김수영만 그러했겠는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모두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다. 험난한 시대를 거칠게 살아왔던 김수영,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시를 만들었다. 그의 눈은 크고 검고 깊다.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고 하는데 그는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까?

그가 거칠어진 이유는 그의 강도 높은 순수 때문이다. 그 순수성은 거친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었다. 겁 많은 눈으로 바라다 보이는 세상의 부조리에 그는 침묵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가 시대를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승화되었다. 국가가 불행한 시대에 살아 시인으로 문명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세상은 너무도 험난했다. 그는 시대를 밝히려 했으나 어두운 밤, 질주하는 시대의 버스는 그를 피해가지 못했다.
그의 유작이 그 유명한 ‘풀’이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