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지역화폐? '지역상품권'
한 나라의 유지·발전에는 많은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시스템은 역시 화폐다. 화폐제도의 기본은 신뢰다. 독립성, 배타성, 불가침성도 확보돼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화폐 발행은 한국은행만 한다. 한국은행법 제4장 ‘한국은행의 업무’ 규정에서 맨 먼저 나오는 조항에 명시돼 있다. 제47조(‘화폐의 발행권은 한국은행만이 가진다’)다. 47조 2항은 더 구체적이다. ‘대한민국의 화폐단위는 원으로 한다. 원은 영문으로 WON으로 표기한다’. 한은법에는 ‘한국은행이 아닌 자는 한국은행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도 있다.

국가 화폐는 이처럼 중요하다. 근래 ‘지역화폐’라는 표현이 남용되지만, 한은법을 봐도 잘못됐다. 정확한 용어는 지역사랑상품권이다. ‘지역사랑상품권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에는 지역상품권 발행 주체가 지방자치단체장이라고 명시돼 있다(제4조). 발행에 관한 사항은 조례로 정한다고도 돼 있다. 발행 여부부터 자치행정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예산안을 뒤흔들며 지역상품권 지원에 7000억원을 배정하라는 요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정부 원안에는 1원도 없는데, 신설하라고 한다. 예산 심의에서 국회가 지출 비목을 신설할 수 없다는 헌법의 위반이다. 예산안 처리에서 국회의 위헌적 구태가 처음은 아니지만 과하다. 지역상품권 발행을 위한 정부 지원이 ‘이재명표 예산’처럼 된 탓이 크다. 지방 경제가 어렵다 보니 이런 인기영합적 예산 배정이 먹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민주당은 이 예산 외에 에너지바우처·새만금 SOC 예산으로 각각 7000억원, 5000억원을 늘리지 않으면 감액 예산을 단독 처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감액 예산은 정부가 역점을 둔 사업의 내년 지출비를 확 깎겠다는 것인데, 정부안보다 줄여 야당 독단으로 처리한 적은 없다. 지역상품권 발행은 정부 예산에서 직접 지원할 사안이 아니라는 행정안전부의 입장 표명도 있었다. 법의 취지, 투입비용 대비 효용성, 지역 간 무차별성 같은 문제점 때문이었다. 지역상품권 논란에 건전재정을 위한 내년 예산안이 뒤틀릴 판이다.

허원순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