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雪後(설후), 李恒福(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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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대진대학교 윤희철교수님 작품>
雪後(설후)
李恒福(이항복)
雪後山扉晩不開(설후산비만불개)
溪橋日午少人來(계교일오소인래)
篝爐伏火騰騰煖(구로복화등등난)
茅栗如拳手自煨(모율여권수자외)
[주석]
* 雪後(설후) : 눈 온 뒤.
* 이항복(李恒福, 1556~1618)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봉호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조 좌랑, 우승지, 이조 참판, 대제학, 병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모후(母后)인 인목왕비(仁穆王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헌의(獻議)하여 논쟁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백사집』 등이 있다.
* 山扉(산비) : 산골 집 사립문. / 晩(만) : 저물다, 저물도록. / 不開(불개) : 열지 않다, 열리지 않다.
* 溪橋(계교) : 시내에 걸쳐진 다리, 시냇가 다리. / 日午(일오) : 한낮. / 少人來(소인래) : 오는 사람이 적다, 오는 사람이 없다.
* 篝爐(구로) : 화로. 본래는 옷을 말리기 위하여 대나무 배롱을 씌운 화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 伏火(복화) : 불을 묻어두다, 묻어둔 불. / 騰騰煖(등등난) : 등등한 기세로 따뜻하다, 매우 따뜻하다.
* 茅栗(모율) : 밤의 일종, 산밤. / 如拳(여권) : 주먹과 같다, 주먹만하다. / 手自(수자) : 손수, 친히, 혼자. / 煨(외) : 굽다, 재에 묻어서 굽다.
[번역]
눈 온 뒤
태헌 번역
눈 온 뒤 산골 집 사립은
저물도록 열리지 않았고
시냇가 다리에는 한낮에도
오는 사람이 적었지
화로에 묻어둔 불이
무척이나 따스하여
주먹만한 산밤을
혼자서 굽는다네
[번역노트]
시골 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이따금 까마귀가 울며 날아가는 해 질 무렵 산골 마을의 눈 온 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질 것이다. 날이 저물도록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집이므로 굳이 사립문을 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집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자리했을 시냇가 다리는 당연히 다른 동네로 통하는 길과 이어지고 있었을 터인데, 한낮인데도 찾아오는 외지인이 없어 마을도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이처럼 쓸쓸한 마을의 고적한 집에서 이 시가 지어진 시점은 하루 가운데 언제였을까? 역자는 저녁을 지나 어중간하게 깊은 밤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립문이 저물도록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밤을 굽는다는 사실로 짐작해 보자면, 적어도 저녁 식사를 앞둔 시점이나 저녁 식사 직후는 아닐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속이 출출하여 입이 궁금해지는 시점에 밤을 굽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자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법 시간이 지난 뒤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고 또 아주 깊은 밤도 아닌 것은, 화로에 묻어둔 불이 무척이나 따스하다고 한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겪어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깊은 밤에는 화롯불의 기운이 약하여 밤을 굽기가 사실상 어렵다.
대개 겨울밤은 깊이를 더하는 만큼 고독이 더해가는 까닭에, 역으로 정담(情談)을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때이다. 세상사 잠시 잊고 화롯가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로 밤을 지샐 수 있는 친구를 백사 선생인들 어찌 떠올리지 않았을까만, 산골의 밤늦은 시각이라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어정쩡하면 친구는 고사하고 가까운 이웃도 청하기가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더 짙은 고적감과 마주하였을 선생이 그제쯤 군밤을 떠올린 것은 나름대로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로에 밤 등을 구워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는 사실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의 아랫 사람들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을 백사 선생이 굳이 손수[手自] 행했다는 데서, 우리는 선생이 느꼈을 무료함의 깊이와 함께 선생이 맛본 재미의 크기도 가늠해볼 수 있다.
백사 선생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을지는 알 수 없지만, 폭설은 아니었다고 해도 적은 양은 아니었을 듯하다. 한낮에도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원인의 일단(一端)을 쌓인 눈의 양에서도 조심스럽게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사 선생이 이 시를 지을 당시에도 역자가 어렸던 시절과 비슷하게 눈이 제법 자주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눈이 정말로 너무나 드물게 내려,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다. 오죽하면 역자가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라는 시구를 패러디하여 아래와 같은 시구까지 장난삼아 만들어 보았겠는가!
天地無氷雪(천지무빙설)
冬來不似冬(동래불사동)
천지에 얼음도 눈도 없으니
겨울이 와도 겨울 같지 않구나
그러나 역자는 기실 이보다 십 수년 전에 이미 그 ‘드문 눈’을 주제로 하여 희시(戱詩) 하나를 정식으로 지어보기도 하였는데, 긴긴 겨울밤에 심심풀이 파적으로 삼아보라는 뜻에서 아래에 첨부하였으니 보고서 일소(一笑)하시기 바란다. 제목은 “待雪戱作(대설희작)”, 곧 “눈을 기다리며 재미삼아 짓다”이다.
自嬰歡雪天(자영환설천)
半百情猶隱(반백정유은)
仙女罷工非(선녀파공비)
今時稀餠粉(금시희병분)
아이 적부터 눈 내리는 날을 좋아하였는데
나이 오십에도 정 여전히 은은하여라.
선녀들이 파업을 하는 걸까?
요사이 떡가루가 드문 걸 보면.
다들 떡가루가 눈을 비유한다는 것과 그 말이 동요 <눈>에 보인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지만, 이 기회에 어린 시절을 한번 떠올려보시라는 뜻에서 노랫말을 여기에 붙여 둔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문풍지가 잉잉 울기도 하고 눈이 사각사각 쌓이기도 하는 겨울밤에, 가끔 할아버지와 함께 화로에서 밤이나 작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동치미 국물을 곁들였던 그 추억의 자리로 역자는 이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백사 선생의 이 시가 그런 추억을 떠오르게도 하고 그리워지게도 하니, 화로조차 없어 이토록 허허로운 겨울밤에 더더욱 고맙기만 하다. 멀고 먼 옛날 시가 훨씬 가까운 옛날 일을 추억하게도 하니, 이것도 시의 마력(魔力)이라면 마력인 것일까?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항복 선생의 「雪後(설후)」는 칠언절구로 압운자가 ‘開(개)’, ‘來(래)’, ‘煨(외)’이다.
2023. 12. 12.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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