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 좀 놓아 드릴게요

우리는 강과 바다, 도로를 건너기 위해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자주 다리를 건넙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넌다’거나 ‘다리를 놓다’는 문장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아득하기만 합니다. 정작 그 구간의 길이와 폭은 생각하지 않고 ‘건너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쩐지 다리 너머에는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도로시가 읊조렸던 ‘오버 더 레인보우’처럼 현실보다 희망찬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습니다.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미구엘과 가족들이 종종 넘나드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금잔화’처럼, 다리는 문학과 영화, 건축 등에서 수없이 인용되면서 ‘연결’과 ‘기대’를 품는 상징적인 구조물로 진화해왔습니다.

거의 1천년 이전의 옛 사람들이 빚어 놓은 건축물에서도 다리는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본격적인 탐방을 위해 사원을 둘러싼 해자(垓子)를 건널 때, 그 옛날 크메르 제국 사람들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해준다’고 믿었던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힌두교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함께 발전해온 대부분의 종교가 건축에 ‘연결’의 의미를 담았을 텐데, 앙코르와트의 규모가 워낙 압도적인 까닭에 그 다리는 유난히 돋보였습니다.
후쿠오카 다자이후텐만구
후쿠오카 다자이후텐만구
‘닿을 수 없었던 공간에 닿게 된다는 점’도 중요하겠지만, 땅보다 조금 높은 길을 걸을 때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시점’이 앙코르와트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매력적인 구조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리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점’을 확보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종의 ‘다리’라고 볼 수 있는 공중보행로를 걸을 때면 늘 새로움을 느낍니다. 사람의 키 높이를 훌쩍 넘기는 공중보행로를 걷고 있으면 차량의 흐름이나 신호 체계는 다른 차원의 것이 되어 도시를 온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하이라인파크,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데, 시드니의 굿즈라인, 서울의 서울로7017처럼 도로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공중보행로는 보행자에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점’을 선물합니다. 물론 대대적인 도심재생사업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오래된 육교와 구름다리는 걷는 재미(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산책을 연상시키는 즐거움)를 줍니다.
서울로 7017
서울로 7017
하이라인파크
하이라인파크
한편으론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도심을 걸을 때에는 그 아래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따뜻하게 보듬어보게 되기도 합니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느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에서 부감(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촬영한 장면)을 즐겨 사용했을 때, 우리는 감독의 시선을 따라가며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인물을 내려다보며 함께 토닥여주게 되었는데요. 공중보행로를 걸으며 세상의 풍경을 보다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는 아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특유의 ‘내려다보기’가 마치 주인공을 보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응원했듯, 저 또한 이제는 ‘내려다본 풍경 속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일이 생겨나길 바라게 되니 어찌 보면 공중보행로가 삶의 태도까지 바꿔 놓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공중보행로를 걷는 보행자를 그보다 좀 더 밑에서 올려다보면 어떨까요? 같은 높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걷는 모습이 비교적 자세히 보입니다. 걷는 사람을 즐겨 그리는 화가 줄리언 오피의 ‘워킹 시리즈’처럼 저마다 다양한 보폭과 개성 있는 걸음걸이가 만들어내는 모습은 도시를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이름난 공중보행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도시 외곽에 무심하게 툭 놓인 볼품없는 육교라고 해도 우아한 걸음걸이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행의 질감이 재료가 되어 도시를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 풍부한 햇살이 한껏 쏟아지는 날,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주제곡인 곤티티(Gontiti)의 ‘아침’을 들으며 공중보행로를 한번 바라보기를 권합니다. 보행자가 마치 클로드 모네의 ‘우산을 쓴 여인’처럼 근사해 보일 것입니다.

○ 다르게 보기의 정석, 월대

경복궁의 광화문,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나란히 월대가 복원됐습니다. 주로 궁궐에 한하지만, 전통 건축물의 정문 앞에 넓게 다져진 기단을 ‘월대(月臺)’라고 부릅니다. 그 이름처럼 이 공간은 최초에 ‘달을 바라보는 대(臺)’라는 뜻에서 비롯됐습니다. 월대는 주로 왕실의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더 이상은 왕(王)이 없는 오늘날에는 우리에게 조금 색다른 경험을 줍니다.

다양한 월대 가운데에서도 종묘의 넓은 월대가 이 구조물의 절정을 보여주는데요. 종묘 정전의 월대를 거닐면 공중보행로와 육교가 부여했던 ‘새로운 시점’과 더불어 보이드(건축·도시 계획 시 개방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간)의 특성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월대에 올라서면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거나 도시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묘 월대에 섰을 때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스스로 ‘서울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될 정도이죠. 몇 시간이고 박석(薄石)을 지르밟으며 새로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 소박한 일탈

이처럼 일상성을 지켜가면서도 가끔은 일탈을 바라는 우리에게, 다리와 공중보행로를 걷고 월대에 오르는 일은 그 소박한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연결해주고 새롭게 보도록 해주는 장소가 있으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부디 이번 주말에는 그 장소를 건너거나 힘껏 올라 보시기를 권합니다.
노들섬 보행교
노들섬 보행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