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대통령까지 줄 세우는 ASML
석(石)판화를 뜻하는 ‘리소그래피(lithography)’의 기원은 18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극작가 알로이스 제네펠더가 1796년 돌판에 유성연필로 글을 쓰고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석판(litho)인쇄술(graphy)을 우연히 개발한 게 시작이다. 평평한 판에 뭔가를 그린다는 게 비슷해서인지 리소그래피는 빛을 활용해 회로를 새겨 넣는 반도체 공정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최근 나노미터(㎚) 단위 회로를 그리는 게 기술력의 척도가 되면서 리소그래피는 반도체 핵심 공정으로 평가된다.

반도체업계의 용어였던 리소그래피는 몇 년 전부터 일반인의 세계로 들어왔다. 네덜란드의 리소그래피 장비업체 ASML이 서학개미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부터다. 칩에 미세한 회로를 효율적으로 그리려면 파장이 짧아야 한다. ASML은 13.5㎚ 파장의 극자외선(EUV)을 활용한 장비를 2017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사명(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Lithography)에서도 알 수 있듯 1984년 설립 이후 한 우물만 팠다. 지분을 갖고 있던 필립스 등이 1995년 발을 빼면서 독자 생존의 길로 몰리기도 했다. 경영진이 찾은 해법은 ‘기술력 확보’다. ASML은 ‘실패할 것’이란 비아냥에도 20년 넘게 EUV 장비 개발을 놓지 않았다.

현재 EUV 장비는 ASML만 만들 수 있다. 캐논 등 날고 기는 일본 업체들이 도전장을 냈지만 나가떨어졌다. 독보적 기술력의 과실은 달콤하다. 장비 가격은 대당 4000억원. 초소형·저전력 반도체 개발의 핵심 장비로 꼽히면서 TSMC, 삼성 같은 기업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11일부터 3박5일 일정으로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도 ASML을 찾는다. ‘강력한 반도체 동맹’을 천명한 윤 대통령은 ASML 본사 방문을 정상회담만큼 중요한 일정으로 내세우고 있다. 거래관계의 ‘을(乙)’인 장비사 ASML이 갑(甲)사인 삼성전자를 보유한 한국의 정상을 움직이는 시대가 온 것이다. 압도적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산업은 물론 국제 관계까지 흔들고 있다.

황정수 산업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