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에너지정책, 비전을 넘어야 산다
미국 정부가 얼마 전 7개의 지역 청정수소생산 허브 프로젝트를 선정하면서 수소경제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했다. 연방정부가 70억달러를 지원하고 400억달러 이상의 민간투자를 이끌어내 그린, 블루, 원자력수소와 같은 청정수소를 2030년까지 매년 300만t씩 생산할 예정이다. 한국의 대표적 이산화탄소 발생 업종인 석유화학, 반도체, 철강 같은 공정에서 쓰는 수소의 1.5배에 달한다. 우리가 탄소중립 로드맵 수립, 전기요금 인상 같은 현안에 묶인 사이 미국은 탄소중립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월 정부는 원자력, 재생에너지, 수소와 같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무탄소 에너지’를 사용해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카본프리(CF) 얼라이언스’를 국제 사회에 제안했다. 2038년까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계획 수립에도 착수했다. 시장의 반응은 기대와 함께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 지켜보는 분위기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에너지 장기 계획이나 비전을 수립할 때마다 실현할 방법을 찾기보다 에너지원별 구성 믹스와 같은 숫자를 정하는 데 지나치게 힘을 소모하고는 한다. 환경과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도 문제다. 탄소중립 로드맵을 우선하다가 장기 에너지 계획을 소홀히 하면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해 미래 에너지 수급을 걱정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제부터 탄소중립과 미래 수급 안정에 핵심적인 대형 프로젝트를 실현할 종합적 방법을 찾는 데 정책의 중심을 둬야 한다. ‘에너지법 제4조’에서도 국가가 에너지 수급 안정을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해법을 찾아 나가면 시장에 신뢰를 주게 돼 투자도 실현되고 일자리 창출과 미래 에너지 문제 해결 역량을 키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현재 논의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청정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 민간업체가 검토 중인 청정수소 생산 등 생태계 조성 사업, 대규모 해상풍력단지 개발 등이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진행하는 핵심 프로젝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현재의 법·제도만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실천 과제를 찾아 필요한 입법을 보완해야 가능하다. 대형 해상풍력이나 수소생산 생태계 조성 프로젝트의 경우 정부가 원자력발전소처럼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추진해야 한다. 사업이 실행되려면 인허가 지원에 더해 전력망 등 인프라 구축, 경제성 확보가 눈에 보여야 한다.

에너지는 다른 산업과 달라 정부가 환경 보호와 안전 외에도 사업자 진입과 퇴출, 가격 규제, 비상시 수급 조정 등 사업 행위를 규제하고 있어 대표적인 규제 산업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이를 관장하는 법안의 이름도 산업진흥법이 아니다. 전기, 가스, 석유 ‘사업법’으로 사업에 대한 인허가와 가격 승인, 사용 제한 및 비축 등 정부가 수급 안정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여러 조치가 포함돼 있다. 이와 달리 수소는 산업진흥, 풍력은 보급 이용 촉진을 위한 기술 개발과 경제성 보완 조치 위주로 법제화돼 있다. 지금은 신기술을 사업화하는 단계로 공급 측면에서 역할이 미미하며, 민간이 투자의 주체고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형태다.

정부는 신산업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 또는 ‘빨간 깃발’을 뽑는 의지로 규제 혁파를 시도했다. 국회 앞에 수소충전소 구축 같은 작은 성과가 있었지만 대형 프로젝트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특단의 대책과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규제 혁파, 정부의 지원 등 종합적인 시책을 마련해보자. 성공하면 큰 성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