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도 밧데리아저씨도 고소…한미반도체, 왜 싸우나? [안재광의 대기만성'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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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반도체 주가는 올 초만 해도 1만원 선이었는데, 11월 장중 한때 6만7900원까지 올랐으니까 고점 기준 다섯배나 급등했습니다. 배터리 못지 않았죠. 인공지능 산업이 커지면 수혜를 많이 볼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인데, 그 얘긴 조금 뒤에 하고요. 여기까지만 보면 모두가 해피한데 이 주가 상승에 딴지, 아니 동의를 못 한 분이 있었어요. 올 한해 배터리 종목 만큼 뜨거웠던 '밧데리 아저씨' 박순혁 작가입니다. 이 분이 한미반도체를 콕 집어서 "이런 주식이야 말로 진짜 거품주다" 하고 저격했죠. 다른 분도 아니고 개인 투자자 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핀플루언서'가 대놓고 저격하니까, 회사 측이 발끈해서 박순혁 작가를 고소하는데 이릅니다. 한미반도체가 어떤 회사길래 거품 논란이 일 정도로 주가가 많이 올랐고, 사람들은 이 회사에 무엇을 기대하고, 또 무엇을 우려하는 지. 이번 대기만성스에서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한미반도체는 1980년에 세워진 반도체 장비 회사입니다. 창업주인 곽노권 회장은 미국 모토로라의 한국 법인, 지금은 ASE코리아로 바뀐, 반도체 패키징 회사에서 14년 간 근무하다가 수입에 의존했던 반도체 금형을 국산화하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해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후에 반도체 웨이퍼를 자르고, 이송하는 장비인 '소잉앤드플레이스먼트'를 만들어서 이 분야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이 공로로 2013년에 정부가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고요.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에선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도 여러번 곽노권 회장을 만나고, 인터뷰도 했는데 소신 발언을 거침없이 해서 살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대기업의 기술 탈취 문제나, 정부의 경제 민주화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한국의 가업 상속 제도가 잘못됐다는 의견도 밝혔어요. 원래 기업 하는 분들이 기자 만나면 여간해선 이런 민감한 말 잘 안 하는데, 이 분은 거침이 없더라고요. 곽노권 회장은 얼마 전에 영면했는데,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한미반도체가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은 2012년이었습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삼성전자에 싸움을 걸었거든요. 기술 특허 소송을 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죠. 삼성전자의 당시 매출이 약 200조원, 한미반도체의 2000억원 대비 1000배 이상 많았고요. '갑과 을'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갑은 당연히 삼성전자인데, 한미반도체의 장비를 대량으로 사주는 최대 고객이었습니다. 또 당시에 만연한 대기업의 협력사 기술 탈취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 여러 면에서 이 소송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건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삼성전자가 한미반도체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사서 쓰다가, 자회사를 통해서 이 비슷한 장비를 만든 게 발단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삼성이 한미반도체 제품을 베꼈다, 그래서 손해본 금액이 200억원을 넘는다, 이 돈 물어내라 하는 소송이었어요. 소송의 결과도 파장이 컸는데, 삼성이 졌습니다. 특허 침해를 1심 재판부가 인정했고 손해배상도, 200억원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하라고 판시했습니다. 이후 두 회사는 합의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당연히 거래 관계는 끊겼겠죠. 한미반도체는 최대 고객사인 삼성전자에 납품을 못해서, SK하이닉스나 대만 반도체 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래서 소송 이후에 10여년 간 매출이 확 늘지 못하고 2000억원 안팎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한미반도체에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인공지능, AI 때문이었어요. 작년 11월에 챗 GPT가 나와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죠. 기존 인공지능과 차원이 다른 성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챗 GPT는 오픈AI란 비영리 법인이 개발한 것인데, 오픈AI의 최대주주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 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인공지능 주도권을 내줄수 없다는 절박함 탓에 구글과 아마존, 메타 같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대대적인 인공지능 투자에 나서게 됐고, 그 결과 인공지능 관련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게 됩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 GPU가 대표적인데요. GPU는 원래 게임이나 멀티미디어 콘텐츠 처리를 위해서 개발된 반도체인데, 인공지능의 핵심 기술인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 러닝, 머신 러닝에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면서 수요가 폭증합니다. 엔비디아 GPU 중에서도 가장 비싼 H100은 현재 개당 가격이 4만달러, 원화로 5000만원이 넘는데도 없어서 못팔 지경입니다. 엔비디아는 이 칩을 대만의 TSMC에 맡겨서 위탁 생산하고 있는데, TSMC는 최첨단인 3나노 공정의 약 90%를 애플에 배정하고 있어서 엔비디아의 GPU 생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가격이 비싸도 성능만 좋으면 팔린다는 것인데. GPU 같은 연산 능력이 있는 시스템 반도체 뿐 아니라 데이터 저장을 담당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성능은 좋은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거의 팔리지 않았던 HBM, 고대역폭메모리나 DDR5 D램 수요도 급증한 겁니다. HBM은 D램을 여러층 쌓아서 만든 초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인데. 이걸 구현하려면 층층이 쌓은 D램 사이를 관통하는 통로, 이걸 TSV라고 하고요. 이 TSV 통로가 촘촘하게 뚫린 D램을 열 압착으로 붙여줘야 합니다. 한미반도체는 이 열 압착 본딩 장비, TC 본더를 생산하기 때문에 주식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전세계 HBM 시장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SK하이닉스가 장악하고 있고, 그래서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로부터 HBM을 주로 받아서 쓰는데. SK하이닉스가 이 TC 본더 개발을 함께 한 곳이 바로 한미반도체입니다.
실제로 한미반도체는 올 9월에 415억원, 10월에 596억원 규모의 TC 본더 장비 공급계약을 SK하이닉스와 체결했다고 공시했는데요. HBM 시장 규모가 지난해 11억달러에서 2027년 51억달러로 빠르게 성장할 전망이고, SK하이닉스 뿐 아니라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 같은 회사들도 HBM 생산을 위한 장비 발주를 늘리고 있어서, 앞으로 한미반도체의 TC 본더 판매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뿐 아니라 삼성전자, 마이크론에서도 장비 달라고 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더 긍정적인 것은 한미반도체의 장비가 메모리 반도체 생산공정 뿐만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공정까지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현재 TSMC가 쓰는 반도체 패키징 장비는 주로 대만의 ASE, AmKor 같은 곳으로부터 받죠. 근데, TSMC의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자기들 GPU에 SK하이닉스의 HBM까지 패키징해서 한꺼번에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TSMC가 직접 한미반도체의 TC 본더를 구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는 겁니다.
또 이것도 가능성이라 실현될 지는 모르겠지만, 엔비디아가 TSMC에 전부 줬던 GPU 물량 일부를 삼성전자에 준다면요.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GPU를 만들어주고, 여기에 자기들이 생산하는 HBM까지 붙여서 일괄 납품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한미반도체 장비 수요가 늘지 않을까 하는 희망회로를 한미반도체 투자자들은 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미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후공정, 그러니까 뒷단에 들어가는 것이라 과거에는 별 주목을 못받았죠. 반도체 장비 하면 네덜란드 ASML이 대표적인데요 이 회사가 만드는 노광장비는 대당 수 천억원이나 하는데도 사려면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하죠. 이런 비싼 장비는 대부분 전공정에 쓰입니다. 후공정은 웨이퍼 자르고, 씻고, 붙이고 하는건데. 이런건 부가가치가 낮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반도체가 3나노, 2나노 이런 식으로 점점 미세 공정으로 가면서 더 이상 미세해지기 어렵게 됐습니다. 이렇게 앞선 기술을 갖기 위해선 몇 십조원을 투자해야 해서 투자비도 많이 들고, 기술이 어려워지면 불량도 많이 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미세 공정 말고 다른걸 개선해 보자, 하면서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게 후공정인 패키징 분야 입니다. 선을 잇고 붙이고 하는 게 패키징이죠. 특히 인공지능을 구현하려면 커다란 데이터 덩어리가 왔다갔다 하면서 열을 많이 내는데, 그래서 반도체와 기판, 반도체와 반도체 사이를 잘 붙이는 본딩 기술에 엄청난 투자가 이뤄지고 있어요.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한미반도체 한국에선 유일한 EMI 차폐 장비를 만드는데, 이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할 여지가 있습니다. EMI 차폐란 반도체 칩의 전자파 간섭을 막아주는 기술입니다. 차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한미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표면에 스테인리스, 구리 같은 금속을 얇게 씌워줍니다.
EMI 차폐는 과거에는 주로 스마트폰, 통신 등의 분야에 필요했는데, 활용 범위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죠. 특히 저궤도 위성통신 산업에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그 중에서도 선두주자죠. 2030년까지 4만개 이상의 위성을 쏘아 올린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저궤도 위성은 통신 기지국이 없어도 인터넷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데, 특징이 고주파 대역을 쓴다는 겁니다. 고주파 대역은 전자파 간섭이 심해서 EMI 차폐를 반드시 해줘야 하는데, 그래서 한미반도체 장비 수요가 커질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애플의 비전프로, 메타의 퀘스트 같은 혼합현실 헤드셋이나 레벨3 이상의 고성능 자율주행 자동차 등의 분야에도 EMI 차폐 장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한미반도체는 당장은 인공지능 반도체 수혜를 볼 것이란 기대 때문에 관심을 받고 있는데 자율주행, 메타버스, 저궤도 위성 등등 현재 각광받고 있는 산업에 두루 걸쳐 있어서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밧데리 아저씨 박순혁 작가가 올해 실적 악화를 근거로 한미반도체 주가에 거품이 있다고 하니까, 회사가 발끈한 겁니다. 더구나 한미반도체는 올해 실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인 400억원이 넘는 주주 배당을 계획하고 있을 만큼 주주가치 제고에 큰 신경을 쓰고 있고요. 직원들에게는 300억원 어치의 자사주를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한미반도체 주식 산 분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행복 지수가 주가에 달려 있는 겁니다. 물론, 한미반도체가 정말 잘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죠. 리스크 요인도 있습니다. 시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건 네덜란드 BESI 같은 글로벌 장비 회사가 메모리 반도체 쪽으로 들어오는 것인데요. 현재 글로벌 장비 회사들은 주로 시스템 반도체, GPU나 CPU, AP 만드는 장비 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근데 HMB 같은 고성능 메모리 시장이 커진다면, 당연히 시장 확장 차원에서 진출할 여지가 있을 겁니다.
회사를 이끌고 있는 곽동신 부회장의 리더십도 증명해야 하는 숙제 같아요. 창업주이자 부친인 곽노권 회장이 없는 지금은 온전히 곽동신 부회장이 경영을 해야 하죠. 물론 곽노권 회장 말년에는 곽동신 부회장이 거의 다 경영을 했지만, 그럼에도 부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곽동신 부회장이 비교적 일찍 회사 지분을 증여받아서 경영권 위협이 없다는 것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현재 곽동신 부회장 보유 지분은 35%에 이르고, 곽노권 회장 지분은 9% 수준인데요. 곽노권 회장 지분의 절반만 상속 받아도 40% 안팎에 달합니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인데도 불구하고, 장비 분야에선 ASML 같은 강력한 기업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는데요. 한미반도체가 인공지능 시대에 ASML 같은 기업으로 올라설 기회를 잡은 것 같습니다. 이미 기대가 많이 반영 되어서기업 가치는 6조원 안팎에 이르고 있지만요. 앞으로 60조원, 600조원 기업이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한국 경제가 잘 되기 위해선 결국 반도체 산업이 잘 돼야 하니까요.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