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여기 궁궐이 있겠어요"…목 좋은데 한적한 경희궁 3대장
"목 좋은데 한적하고, 괜히 여기 궁궐이 있겠어요. 근처 신축 단지보다 저렴하고 면적은 더 넓어서 실거주로는 이만한 곳이 없어요."(서울 종로구 사직동 S 공인중개 대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애초에 가치가 높아 감가상각이 일부 있어도 훌륭한 물건을 이른다. 업계에서는 서울 강북 아파트 중 '준치'를 뽑는다면 경희궁 '터줏대감' 3대장을 꼽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종로구 사직동 '풍림 스페이스본', 내수동 '경희궁의 아침'과 '경희궁 파크팰리스'다.

고즈넉한 경희궁 옆…광화문·여의도 '직주근접'

세 아파트 모두 2000년대 지어졌다. 경희궁의 아침은 2004년 쌍용건설이, 경희궁 파크팰리스는 2006년 삼성물산이, 풍림 스페이스본은 2007년 말 풍림산업이 준공했다. 전용면적 100~200㎡ 사이 대형 면적이 다수다.
"괜히 여기 궁궐이 있겠어요"…목 좋은데 한적한 경희궁 3대장
매매가도 엇비슷하다. 풍림 스페이스본 1단지 전용 159㎡는 지난달 20억원에 손바뀜했다. 경희궁의 아침 3단지는 전용 150㎡가 지난 9월 20억8000만원에 거래됐다. 경희궁 파크팰리스도 전용 146㎥는 지난 3월 18억원에 매매가 이뤄졌다.

인근 신축 단지인 종로구 홍파동 '경희궁자이'와 비교하면 가격 메리트가 크다. 경희궁자이 3단지 전용면적 85㎡는 지난 10월 20억원에 거래됐다. 3.3㎡당 가격으로 따지면 풍림 스페이스본과 경희궁의 아침, 경희궁 파크팰리스는 4000만~4500만원, 경희궁자이는 7000만~7800만원 선으로 두 배 가까이 차이 난다. 경희궁자이는 대단지에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 가격대가 높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실거주 목적이라면 풍림 스페이스본·경희궁 파크팰리스·경희궁의 아침도 좋다는 반응이다.
경희궁 파크팰리스 단지 내 전경 / 사진= 김동주 기자
경희궁 파크팰리스 단지 내 전경 / 사진= 김동주 기자
세 아파트의 입지는 경희궁과 사직단 사이다. 전근대 시기 궁은 국가와 도시의 핵심이었다. 경희궁은 그중에서도 더 중요했다. 조선 후기 '서궐'로 불리며 '동궐' 창덕궁·창경궁과 '양궐'로 불렸다. 위로는 종묘와 함께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이, 옆으론 이성계 개인 자산에서 나아가 왕실 자산을 관리하던 내수사가 있었다. 사직동과 내수동이란 이름이 붙은 유래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도심이라는 입지는 변하지 않았다. 세 아파트 모두 3호선 경복궁역, 5호선 광화문역에서 700m 이내다. 여의도역까진 7정거장,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지나면 신촌도 금방이다. 심지어 광화문 인근 김앤장 변호사사무소, 서울경찰청, 정부서울청사 등은 도보생활권이다. 유서 깊은 '직주근접'이다.
경희궁의 아침 2단지 내부 사진 / 사진=김동주 기자
경희궁의 아침 2단지 내부 사진 / 사진=김동주 기자
조선의 쇠락과 함께 전각이 헐리는 등 수난을 겪은 경희궁이다. 2002년 복원을 완료했지만, 인지도는 다른 궁궐보다 낮다. 하지만 주민 입장에선 낮은 관심도가 오히려 '호재'다. 북적거리는 도심 속 주민에게 고즈넉한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늘 관광객으로 가득한 덕수궁, 경복궁 등과는 다르다. 인근 서울역사박물관과 성곡미술관도 주민에게는 쉼터다.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광화문 광장까지 800m, 서촌도 사직로만 건너면 바로다. 수성동계곡과 인왕산공원도 금방이다. 병원도 도보 1㎞ 이내에 강북삼성병원과 서울적십자병원이 있다. 하나로마트 서서울농협 사직점도 풍림 스피이스본 상가 안에 있다.

"젊은 변호사·펀드매니저 찾아온다"

직주근접과 분위기가 도심권역(CBD) 직장인 선호로 이어진 모양새다. 지역 '토박이'에 더해 광화문에서 일하는 변호사와 고위 공무원, 신촌 주변 대학교수, 최근엔 여의도로 통근하는 젊은 펀드매니저까지 경희궁 '궁세권'을 찾는다는 반응이다.

사직동의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신촌에서 병원장 하던 사람도 여기 살고, 전 총리도 경희궁의 아침 3단지에 살면서 오피스를 두고 있다"며 "위치가 위치다 보니 '전통 부호'도 많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괜히 여기 궁궐이 있겠어요"…목 좋은데 한적한 경희궁 3대장
터줏대감 3대장으로 불리는 세 아파트지만 차이는 있다. 대형 주상복합인 광화문 풍림 스페이스본은 2개 단지로 지어졌다. 1단지는 14층 5개 동에 657가구가 살고, 2단지는 13층 1개 동에 87가구가 거주한다. 오피스텔은 12층짜리 2개 동에 286실로, 총 1030가구 규모다.

경희궁의 아침은 주상복합 3개 단지다. 2단지부터 4단지까지다. 시공사가 달라 따로 이름을 붙인 파크 팰리스가 1단지다. 아파트 360가구에 오피스텔 1031실을 합쳐 총 1391가구가 산다. 1개 단지로 이뤄진 경희궁 파크 팰리스는 총 16층 3개 동에 총 142가구 규모다.
풍림 스페이스 본 2단지 전경 / 사진= 김동주 기자
풍림 스페이스 본 2단지 전경 / 사진= 김동주 기자
풍림 스페이스본은 경관 덕에 인기가 좋다는 평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이 '인왕제색도'로 담은 풍경을 북향으로 볼 수 있다. 학군은 경희궁 파크팰리스와 경희궁의 아침이 낫다는 반응이다. 서울형 혁신학교로 수영장 등 시설을 갖춘 덕수초 때문이다.

경희궁 파크팰리스와 경희궁의 아침을 찾는 사람도 차이가 있다. 광화문역이나 경복궁역과의 거리가 중요한 사람은 경희궁의 아침을, 주상복합 특유의 '답답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경희궁 파크팰리스를 선택한다는 반응이다.

"고금리 시대 실거주 목적으로는 충분"

현장에서는 세 아파트의 비교 대상으로 경희궁자이를 꼽았다. 2017년 GS건설이 완공한 경희궁 서쪽 '신흥강호'다. 단순한 동서 차이가 아니다. ‘3대장’이 사대문 안에 있다면 경희궁자이는 돈의문 한양도성 서쪽, 5호선 서대문역과 3호선 독립문역 사이다. 총 4개 단지 최고 21층 30개 동에 2533가구다.

최근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역에 실거주자가 많아 집을 구하는 사람은 가격이 내리길 기다린다. 반면 집주인은 매물을 내놓지 않아 매매 수가 급감했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런 특징이 '장점'이 될 수 있다고 현장에선 말했다. 가격 변동이 작고 안정적인 만큼 고금리로 시장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설명이다. 내수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지하철 교통편은 경희궁자이보다 낫고, 광화문이나 여의도에서 일하면서 살기는 강남보다 낫다"면서 "대출이 어려워 투자가 곤란한 지금 시점에서 직접 들어갈 목적으로 집을 구한다면 저 세 아파트 같은 곳이 없다"고 했다.

김동주 기자 djdd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