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콘트라베이스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한테나 가서 물어보세요. 어떤 음악가라도 오케스트라가 지휘자 없이는 굴러가지만 콘트라베이스 없이는 안 된다고 말할 겁니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74)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의 한 대목. 베이시스트인 화자는 자신의 악기를 두고 이런 독백을 한다. 실제로 오케스트라 맨 뒷줄에 있는 가장 덩치 큰 악기, 더블베이스(콘트라베이스)는 소리가 튀거나, 주목받는 악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오케스트라 연주에 필수다. 가장 낮은 음역에서 다른 파트들을 받쳐주기 때문에, 건축으로 치면 기본 골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베이시스트 최승규가 지난 14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최다은 기자
베이시스트 최승규가 지난 14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최다은 기자
필수적이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은 아이러니. 베이시스트 최승규(29)는 20년 가까이 악기를 하며 이런 점이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예원·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 한경아르떼필하모닉에 소속된 프로연주자다.

"어떤 연주자나 자기 악기를 사랑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잖아요. 근데 베이스는 합주할 때도 다른 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습시간이나 전체적인 비중이 적어요. 속해있는 악단(팀)에 지금보다 더 도움되는 존재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죠. "(최승규)

그런 이유로 그는 공연 기획을 비롯해 색다른 시도에 목말라 있었다고. 그렇게 4개월 전 개성 넘치는 프로 연주자들을 모아 5인조 앙상블을 꾸렸다. 클래식 악기에 모던악기를 더한 크로스오버 앙상블 '클랙트릭스'(클래식+일렉트릭)가 그 결과물이다. 지난 14일 서울 서초동의 한 연습실에서 만난 클랙트릭스 멤버들은 스스로를 "클래식을 최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연주그룹"이라고 소개했다.
클랙트릭스 프로필.
클랙트릭스 프로필.
언뜻보면 바이올린 두 대, 첼로, 콘트라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평범한 피아노 5중주와 유사하지만 이들은 클래식 실내악단의 전형에서 탈피했다. 피아노는 신디사이저로, 2대의 바이올린 중 한대는 악기 몸통 부분이 뻥 뚫린 일렉 바이올린으로 구성했다. 연주 프로그램도 클래식, 영화음악, 재즈, 대중음악 등을 그들 만의 색채에 맞게 편곡한 곡들을 위주로 연주한다.

이 단체에서 유일하게 클래식이 아닌 장르에서 활동하는 멤버는 바이올리니스트 김회민(28). 전자 바이올린(일렉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는 스스로를 '길거리파 뮤지션'이라고 부른다. 그는 클래식 바이올린으로 음대를 다니다 재즈로 전향한 뒤로 재즈 오케스트라, EDM(전자음악) 밴드, 록밴드 등 다양한 장르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승규와 김회민은 군악대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 마다 '동작역 4번 출구'라는 듀엣으로 연주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고. 두 사람은 동작역 인근에 있는 국군교향악단에서 복무했다. 최승규는 "원래 '골수 클래식파'였는데 군악대에서 재즈와 실용음악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재즈는 악보에 음표가 빼곡하지 않고 알파벳(코드)가 있어요. 그걸보고 별의 별 연주를 만들어 내더군요. 대중음악 밴드는 즉석에서 12개의 키(조성)에 맞춰 연주 하더라고요. 클래식은 합주를 할 때, 12곡을 연주하려면 악보를 읽고, 한곡씩 다 맞춰봐야 하거든요. (클래식에 비해) 효율이 너무 좋은거죠. 긍정적인 의미로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겐 신세계였어요. "(최승규)

바이올리니스트 장은정(31), 피아니스트 성동희(29), 첼리스트 고준영(26) 등 다른 멤버들 역시 클래식 전공자들이지만 새로운 시도에 목마른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장르를 서로 넘어가는 시도가 많아지는만큼 우리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최근 공연계의 화두 중 하나는 융합이다. 국악과 클래식, 영화음악을 융합한 작곡가 정재일의 콘서트, 판소리에 극을 조합한 창극 등이 국내외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석사 과정)에 재학중인 피아니스트 성동희는 클랙트릭스로 합류하면서 처음 신디사이저를 연주했다. 헬스 매니아로 일반인에 비해 큰 체격을 가진 그에게는 일단 악기의 크기부터 낯설었다고.

"길이가 2m 가까이 되는 그랜드 피아노를 치다가 그에 절반도 안되는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니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피아노는 옆을 보느라 관중을 마주보지 못하는데 정면을 보고 같이 서서 연주하는 점도 감각적으로 매우 새로웠어요. "(성동희)

익숙한 클래식을 버리고 색다른 시도를 택한 만큼 당연히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클래식에서 잘 안쓰는 리듬에 익숙해져야 했고, 손에 익지 않은 색다른 주법으로 연주해야 했다. 평생 클래식만 해오던 멤버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던 셈.

바이올리니스트 장은정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이 대부분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태어나서부터 클래식과 함께 자랐다. 흔히 말하는 '성골'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예원·예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독일 라이프치히 음대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명문 악단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등에서 인턴 단원으로 근무한 재원이다.

서울 서초동의 한 연습실에서 합주중인 클랙트릭스. 최다은 기자
서울 서초동의 한 연습실에서 합주중인 클랙트릭스. 최다은 기자
"저도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인데, 회민이가 보여주는 테크닉을 도저히 하기 어려울 때도 있거든요. 악기를 오래해왔는데 새로운 주법을 배우니까 가끔씩 새로 태어나 걸음마를 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제는 저도 꽤 익숙해져서 제 음악의 범위가 넓어진 듯 해요. " (장은정)

"재즈에서만 쓰는 복잡한 당김음 리듬이 있어요. 클래식에서는 가끔 나오지만 재즈에서는 연달아서 계속 등장하죠. 클래식을 배웠기 때문에 리듬을 칼같이 나누는 게 익숙해서 오히려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에만 의존하지 않고요. 문제는 가끔 클래식 곡 연주할때도 재즈 풍이 나오더라고요(웃음) " (성동희)

일렉 바이올린이 클래식 앙상블에 포함되면 어떤 소리가 날까. 일렉 바이올린은 '이펙터'가 있어서 신디사이저처럼 소리를 고를 수 있다. 원하는 소리를 직접 만들 수도 있어 아예 처음 듣는 사운드로도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 "앰프(음향 증폭)가 있는 바이올린 소리가 지나치게 크지 않을까 크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조절이 충분히 가능하더라고요. 전자 악기로 소리의 선택지가 대폭 늘었다는 점에서 클래식 악기만 모인 앙상블의 한계가 깨진 거라고 생각해요. "(김회민)

크로아티아의 막심 므라비차, 투첼로스처럼 세계 투어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음악 단체가 되고 싶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막심 므라비차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유명한 크로스오버 분야의 세계적인 스타 중 하나다. 투첼로스는 마이클잭슨, 콜드플레이 등 유명 대중음악을 편곡한 연주로 유튜브 스타가 된 2인조 첼리스트 그룹이다.

"클래식 음악으로만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인건 분명하죠. 그래서 (클래식이) 싫다는 게 아니고 더 넓게 보면 새로운 시장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미디어가 워낙 활발한 세상이니까요. 그렇게되면 배고프지 않고도 연주활동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최승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라는 이들은 오는 20일 서울 신사동에서 첫 공연을 한다. 일렉 바이올린의 사운드가 돋보이는 베토벤 소나타 비창 3악장, 재즈풍으로 편곡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를 연주한다. 중간 간주 부분을 바로크 스타일로 편곡한 스팅의 '잉글리시맨 인 뉴욕'도 들려줄 예정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