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가 홀딱 빠져 발문까지 써 준 시집의 1956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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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 영랑시선(永郞詩選) / 정음사 / 1956년 5월 28일 발행
― 영랑시선(永郞詩選) / 정음사 / 1956년 5월 28일 발행
초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그러나 유난히 빛났던 책
영랑 김윤식의 시집 <영랑시선>은 1956년도에 나온 것임에도 초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남다른 재판본이기에 초판본이나 다름없는 책이다.우선 이 책을 구한 곳은 인사동 고서점 ‘호산방’이었다.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거장들의 빛바랜 단행본들이 즐비한 가운데 유난히 빛나던 책, 그게 바로 <영랑시선>이었다. 당시 내 처지에 비추어 조금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음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갑을 열었던 기억이 새롭다.
영랑 김윤식(1903~1950)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 제3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했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펴냈다.
영랑은 광복이 될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하면서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그는 1950년 6·25전쟁 때 부상당하여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영랑은 생애 86편의 시를 남겼는데, 1949년판 <영랑시선>에는 그때까지 쓴 시들 중에서 영랑 스스로 선별한 시 60편이 실려 있다. 책이 나온 이듬해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대로 사라질 뻔했던 것을 미당 서정주(1915~2000)가 이헌구(1905~1982) 등과 정음사에서 다시 발행한 것이 바로 1956년판 <영랑시선>이다.
표지를 보면 상단에 왼쪽으로 치우쳐서 시집 제목 ‘永郞詩選’과 지은이 표시 ‘金允植 著’라는 글자가 붉은색 활자로 표기되어 있고 바탕에는 세련미 넘치는 독특한 문양들이 뒤표지까지 가득 채워진 가운데 하단 오른쪽에는 출판사 이름 ‘正音社’가 마찬가지로 붉은색 활자로 표기되어 있다. 가로 150mm, 세로 210mm 크기(A5 혹은 5×7판)에 쪽수 표기가 없고, 본문에 수록된 작품들은 3부(Ⅰ. 찬란한 슬픔, Ⅱ. 사행시, Ⅲ. 망각)로 나뉘어 모두 일련번호로만 구분된 채 실려 있다.
다만, 말미에 일련번호와 함께 제목이 한꺼번에 실려 있어서 대조해 보면 시의 제목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행시 장에 속해 있는 54번 시만 제목이 없다.(내가 소장한 책에는 접지 혹은 제본 및 인쇄 오류가 있는 듯 29번 시 다음에 ‘Ⅱ. 사행시’ 표제가 있고, 말미 차례 부분에서도 30번부터 53번까지의 시 제목이 누락되어 있다. 간기면을 보면 인지가 붙어 있으나 누구의 도장이 찍혔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책값은 당시 돈으로 500원이었다.)
정지용 시인은 언제 유명을 달리했을까?
1956년판 <영랑시선> 말미에 붙은 발문(跋詞)에서 미당은 이미 10대 때 영랑의 시에 매료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영랑과 ‘시문학’ 동인이었던 박용철 또는 정지용 시인이 발문을 써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대목을 볼 수 있다.(현대표기에 맞게 필자가 고침)그 뒤 나는 다시 우연한 기회에 고 박용철 씨 댁에서 선생을 친히 만나게 된 후 18년 동안 선생이 거느렸던 시의 정서와 품격은 오늘날 내 한쪽의 귀감이 되어있거니와 내 이제 여기 한 후배로서 이 시선집의 발문을 씀에 있어 선생과 함께 못내 애석해 견딜 수 없는 것은 살아있는 정지용 씨와 돌아간 고 박용철 씨의 일이다. 두 분이 다 영랑시선의 발문을 쓰기에는 누구보다도 적임자들이거늘 한 분은 영랑의 처녀시집을 꾸며놓고는 이내 유명을 달리했고 또 한 분은 같은 조국 위에 있으되 해방 후 서로 뜻을 달리하고 있다. 이 어찌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 아니냐!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지용 시인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해 9월 경 북한으로 끌려가다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일부 문헌에서는 아직도 사망시기를 ‘미상’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1956년에도 여전히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미당은 ‘해방 후 서로 뜻을 달리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보아 정지용의 이념적 노선이 영랑과는 달랐기에 월북해서 북쪽 어딘가에 살고 있으려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정지용 씨’라는 단언적 문구로 보아 당시에 정지용 시인이 살아있었음을 미당이 확신하고 쓴 표현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지용 시인의 6․25전쟁 이후 행적에 대해 좀더 확실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왜 영랑을 기억해야 하는가?
미당 서정주의 발문에 이어 서문 형식으로 평론가 이헌구의 ‘재판(再版)의 서(序)에 대(代)하여’라는 글이 붙어 있어 이 책의 발간 경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이헌구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타도에 앞장섰던 우파 문필가답게 서두를 ‘붉은 이리떼의 침범’이란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터진 전쟁 와중에 “영랑 김윤식 형을 잃어버린 것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가장 큰 통한이요 충격”이었다고 쓰고 있다.이어 중공군 참전에 따른 1·4후퇴로 인해 더욱 황폐해진 서울 명동거리를 김광섭 시인과 거닐다가 거리 구석의 어느 허름한 책방에서 1949년판 <영랑시선> 두 권을 발견하고는 ‘반갑고 또 서글펐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후 이 시집과 함께 다시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나 4년여의 세월이 흘러 상경한 다음 비로소 <영랑시선>의 재간행을 추진하던 중, 기적적으로 대한인쇄공사의 창고에서 1949년판 <영랑시선>을 인쇄했던 지형(紙型)을 발견함으로써 드디어 1956년판의 발행이 가능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울러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 소회를 “우리의 향 맑은 옥돌과도 같으며 소박하고도 현란한 언어미의 여운이 담뿍 풍겨지는 형의 시가 다시금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을 우리 문단뿐 아니라 장래의 많은 시학도(詩學徒)를 위하여 감격하며 기뻐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개인적 감격을 떠나 영랑은 우리 시문학사에 길이 남을 거성(巨星)임에 틀림없다. 30년 세월 동안 시를 썼음에도 100편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과작(寡作)이었고, 일제강점기와 광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이름을 떨쳤지만, 영랑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호젓이 고향마을(전남 강진)을 지켰다.
발문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이 영랑의 일생을 머금은 <영랑시선>을 가리켜 “여기 저 일제 30여 년 동안의 온갖 유명(有名)을 회피하고 숨어서 이 나랏말의 운율(韻律)만을 고르고 있던 이의 선택된 정서들을 조용히 보라”고 읊조린 까닭을 이제 알 수 있겠다. 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를 넘기면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흔일곱 번 넘긴 한 사내의 초상이 나온다.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있건만 전혀 근엄해 보이지 않는, 오늘날로 치면 제법 얼큰(?)한 용모라서 그런지 친근해 보이지만 슬픈 듯 나를 쳐다보는 그이의 눈빛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