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시인들은 갈대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써 왔다.

울적한 심정을 나타내는 시가 유독 많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또 한 해를 보낸 것이 아쉬워서일까…
그러나 마냥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잘 살펴보면 갈대가 자리한 물가는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생명체의 터전임을 알게 된다.

힘차게 날갯짓하는 생명체들을 보면 또 다른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imazine] 갈대가 있는 풍경 ② 생명력 가득한 순천만
◇ 황금빛 물결 그윽한 순천만 습지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에는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시구가 있다.

팬데믹 여파로 인한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다.

모두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 아닐까.

갈대가 어우러진 순천은 조용히 한 해를 되돌아보기 좋은 곳이기도 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황금빛 갈대 천국인 순천만에는 두 군데의 명소가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이 순천만습지의 대명사가 된 용산전망대 인근이며 또 다른 한 곳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와온해변이다.

와온해변은 길게 뻗은 뻘밭과 황금빛 갈대의 모습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와온해변에서 용산전망대까지는 길게 난 걷기 길로 연결돼 있다.

때마침 해가 지고 있다.

둑길을 따라 거닐다 보니 바람이 일렁이는 갈대의 모습이 물결처럼 다가온다.

그야말로 황금빛 물결이다.

해안 전체가 어쩌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순천만은 홀로 여행을 떠나기에 최적의 장소다.

일단 대중교통이 잘 돼 있다.

KTX를 타고 순천역에 내리면 순천만습지로 향하는 버스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이제 내년을 위해 긴 단장의 시간에 들어갔다.

덕분인지 많은 관람객이 순천만습지로 몰려든 것 같았다.

◇ 생태관광의 메카 된 순천만

관광객들은 초겨울 갈대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시간을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필자의 방문 목적은 조금 달랐다.

순천시 순천만 보존팀 소속의 황선미 박사를 만났다.

조류 전문 사진작가 이종렬 씨의 소개로 만난 황 박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지금 흑두루미 6천 마리가 순천만을 찾았어요.

"
순간 흑두루미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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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228호인 흑두루미는 세계적으로 1만8천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세계적인 희귀 조류가 아닌가.

바로 연구소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황 박사와 함께 흑두루미가 먹이활동을 하는 논두렁으로 향했다.

순천만습지 출입구에서 자전거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논두렁에는 까맣게 흑두루미들이 자리 잡고 앉아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흑두루미가 자리 잡은 논두렁을 지키고 있는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철새들이 안전하게 먹이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길목을 지키고 있고
그 이외의 지역은 모두 높다란 갈대를 꺾어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장벽이 끝나는 지점에는 야생 조류 전문 사진작가들이 800mm 이상의 망원렌즈를 받쳐놓고 흑두루미 촬영에 여념이 없다.

일부는 망원경으로 두루미를 감상하고 있다.

순천만 보존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8∼2009년 사이에는 흑두루미 개체가 300여마리에 불과했다.

순천시에서 꾸준히 보존 활동을 펼쳐온 덕분에 이제는 이곳이 각종 철새의 메카가 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는 1만여마리 이상이 순천만을 찾아올 정도가 됐다.

이종렬 작가는 "지난해 일본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해 인공적인 먹이를 주지 않은 바람에 흑두루미가 순천만으로 몰렸다"며 "순천만에서 어느 정도까지 먹이를 줘야 하는 지가 논의 중으로, 이곳에서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숫자는 6천마리 정도"라고 말했다.

흑두루미들의 먹이활동을 확인한 뒤 먹이활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물러났다.

◇ 조곡동 철도관사 마을

순천에는 철도와 기차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담긴 '철도관사 마을'이 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순천에 전라선 개통과 철도사무소 유치로 철도국 순천사무소 직원의 주거 안정과 시설관리 등을 위해 현재의 조곡동에 공공임대 주택의 성격인 '철도 관사'가 들어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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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형태로 길을 내고 152세대의 철도관사가 조성되었지만, 현재는 상당수가 신축되거나 개·보수됐다.

철도관사마을은 일본인들이 만들었지만, 해방 이후 한국 철도 발전과 함께한 철도인들이 80여년 동안 주민들의 노력으로 철도문화 마을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은 철도와 기차 역사를 품은 조곡동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주민자치위원회가 '마을 유래 찾기', '관사마을 구술 생애사' 등의 책자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단정된 마을의 모습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집 지붕에는 복(福) 자가 3개나 붙어 있다.

삼복(三福) 집안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오래된 마을이었지만, 도시가스 배관이 집마다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생활 수준도 높으면서 마을의 분위기도 고즈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 한구석에는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빨래했는지 빨래터 모양을 갖추고 있다.

아직도 맑은 물이 솟아 나오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가지 대신에 안전 모자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왠지 안전한 물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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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거리

향동 일대는 한때 하숙집과 자취방을 가득 메우던 곳이었지만,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잊힌 공간이 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2014년 순천시 주거지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은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됐다.

오래된 역사 속에 그대로 마을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택 개보수보다는 생태에 초점을 맞춰 집들을 정비하고 주변과 거리에는 '이웃사촌' 정원을 조성해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느리게 걷다 보면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구전돼 온 주민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작은 골목길마다 특색 있는 간판과 장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돌아다녀 볼 만한 느낌이 든다.

특히 순천창작예술촌 건물이 인상 깊었다.

이 건물 이층에는 작가의 방이 있고, 그 앞 텃밭에서는 싱싱하고 푸른 배추가 자라고 있다.

바로 앞 골목에는 갖가지 버려진 전기장치를 이용해 강아지 모양, 고양이 등으로 만든 작품들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정감이 갔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벽화 거리보다는 훨씬 창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순천드라마촬영장

지방 여행을 다니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 드라마세트장이다.

순천에도 드라마세트장이 있다.

입구를 지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순천 드라마촬영장은 1960∼1980년대 서울 변두리, 달동네, 순천 읍내를 재현한 세트장이다.

드라마 '파친코',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제빵왕 김탁구' 등 70여 편의 영상 작품을 촬영했다.

그래서인지 관람객 가운데 서울 사람들이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 판자촌과 건물을 재현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옛날 교복 체험, 고고장 등 복고 분위기의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중년층 관람객이 모두 반가워하는 드라마 간판이 하나 있었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에덴의 동쪽'이다.

평균 시청률 29.8%에 달했던 이 드라마는 동시에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두 남자의 엇갈린 운명과 복수를 다룬 드라마로, 송승헌과 연정훈 등 당대 미남 배우들이 총출동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영화·드라마 촬영과 관광을 연계한 이곳의 지역경제 기여 효과가 최대 수천억 원대에 달한다는 한국 영화산업전략센터의 조사 결과도 있었다.

팬데믹 직전에는 드라마세트장의 10년간 지역경제 기여 효과가 1천868억원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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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전망대에서 맞은 생명의 장엄함

순천 시내 투어를 마친 다음날 황 박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차로 직접 지역의 생태 환경을 안내해 줬다.

그의 안내로 처음 도착한 곳은 순천만과 연결된 작은 소하천인 동천이다.

동천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많은 새를 만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이곳에서는 노랑부리저어새 무리를 만났다.

천연기념물 제205호인 노랑부리저어새들이 앉아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긴 부리를 물속에 넣고 좌우로 천천히 저으며 물속의 먹이를 찾는 모습이었다.

동네 하천 같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을 넋을 잃은 채 관찰했다.

오후에는 용산 전망대로 향했다.

이곳에선 아름다운 순천만의 모습과 석양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접한 용산전망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없는 인파에 깜짝 놀랐다.

그 가운데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무리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흑두루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흑두루미 수천 마리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신 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황 박사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윽고 논두렁에서 먹이활동을 하던 흑두루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먹이활동을 한 뒤엔 갯벌로 이동해 잠을 잔다.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수천 마리의 흑두루미가 날아가며 내는 울음소리는 소리는 감동 그 자체다.

서라운드로 들리는 흑두루미 무리의 울음은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교향곡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연말의 우울함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2023.09.12 송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