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색깔 공기’는 투병 중이던 아버지 고(故) 김치영 목사와 4개월 동안 병상에서 아들 김동건 교수가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책에 애착심을 갖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 이 책에는 김목사가 평생 수집한 책으로 꾸며진 서재를 성스러운 공간처럼 묘사했다. 교수 아들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을 만큼.

김 목사처럼 그럴싸한 서재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작가 김훈의 경우는 의외로 정 반대이다. 그는 필요한 책만 구해서 본 후 바로 없애버린다. 그나마 집에 가지고 있는 책들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히 소화를 시킨 것들 뿐이다.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에게는 전등과 곡괭이면 충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출처 = 필자 제공
출처 = 필자 제공
유학 시설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기간이기도 했다. 독서는 일상의 탈출구 같았다. 그래서 책 읽기 대한 원칙을 세웠다. 가방 안에 전공과 관련 없는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닐 것. 그리고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단 1분이라도 책을 꺼내 들을 것. 단순한 두 가지 원칙은 일상 속 찰나의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했고, 덕택에 소설, 수필, 사회과학, 인문학, 종교, 미술, 건축 관련 서적까지 관심의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었던 때였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밑줄을 그었고, 책의 구석에 메모를 남기며 치열하게, 그렇지만 행복하게 읽었다.
출처 = 필자 제공
출처 = 필자 제공
뉴욕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스트랜드 서점 같은 곳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1927년 미국 이민자에 의해 세워진 이 서점은 총 29킬로미터에 달하는 책장에 230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중고서점으로 다양한 장르의 책과 희귀 악보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스트랜드 서점에 들를 때마다 헌책 더미들 속에서 쓸만한 악보들이 가끔씩 등장한다. 연주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시마노프스키 교향곡 2번이라니. 누렇게 빛바랜 표지에서 세월이 읽혔다.
출처 = 필자 제공
출처 = 필자 제공
유학 시절 애용했던 단골 악보가게 아르스 노바는 중고 악보와 음반들을 취급한 보물섬 같은 곳이었다. 신기한 악보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지만,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해결해 주던 서점 주인 폴 아저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점도 유익했다. 폴을 통해 알게 된 중고 매물의 출처는 단순했다. 은퇴하는 현역들이 처분을 하거나, 유가족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 앞으로도 쓸 것 같지 않은 악보를 골라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공부하고 기록하며 연주했던 분신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출처 = 필자 제공
출처 = 필자 제공
십 수년 전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를 지휘했던 적이 있다. 이 악보에는 작품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부터 쌓아온 중요한 내용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원어 가사와 대사의 뜻을 깨알 글씨로 옮겼고,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중요한 부분들을 표시한 보물 같은 악보였다. 몇 년 후, 같은 곡을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할 기회가 생겼다. 반가운 악보를 다시 꺼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짬짬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방을 분실하고 말았다. 도둑은 가방 속 랩탑이 쓸만해 보였겠지만, 진짜 보물은 그게 아니었다. 찾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악보를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새 랩탑을 사주고서라도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다. 악보야 새로 사면 그만이겠지만, 손때 묻은 기록의 상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출처 = 필자 제공
출처 = 필자 제공
불문학자였던 황현산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듯이, 음악가는 악보를 통해 작곡가들과 대화한다. 방 한쪽 벽에 빽빽하게 들어찬 악보를 통해 역사 속의 인물을 오늘로 불러낸다. 이 영감의 장에서 논쟁이 타오르고, 호소와 설득을 지나 거룩한 타협에 도착하면 새로운 내가 된다. 이곳은 성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