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때가 있다…마치 껴안아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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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성태의 탐나는 책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2023, 웅진지식하우스), 정여울 지음,이승원 사진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2023, 웅진지식하우스), 정여울 지음,이승원 사진
지붕 없는 눈길을 걷는 것만큼 사람 없는 미술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나는 좋다. 말없이 말을 거는 풍경 속에 있으면 내 안의 빛과 그림자가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문을 연 지 몇 분이 흐르지 않은 미술관에 발을 디딜 때면,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땅에 처음 발자국을 찍는 기분이 든다. 그때마다 황동규 시인의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가 서서히 떠오른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몸을 나릿나릿 움직이다 보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내가 일하는 출판사는 가회동에 있다. 그곳에서 오 분쯤 걸어가면 조각이나 회화를 쉬이 만날 수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마음이 소란스럽거나 하루가 부서진 뗏목 같을 때 근처에 있는 미술관을 찾는다. 최근에는 김종영미술관에 다녀온 후 그가 한 말을 펜으로 정성껏 옮겨 적었다. “예술은 지혜와 용기, 사랑 없이는 이룰 수 없어요. 만용을 부려서도 안 되고 지혜만 있고 용기가 없어서도 안 돼요. 고독한 길이니까요. 물론 그 바탕에는 사랑이란 윤택한 마음이 있어야지요.” 화집이나 도록을 모으는 나는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이 출간되어 사뭇 반가웠거니와, 이는 세 가지 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가 미술 교양서를 쓸 때 나는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했다. 한 달 전, 어느 서점에서 몇 장을 넘기던 내 손은 맹수처럼 잽싸게 책을 쥐었고, 내 발은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내가 읽고 싶던 책을 어느 편집자가 만들어주어 고마웠다. 그가 써야만 했던 책을 썼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해설하거나 비평하거나 분석한다는 느낌을 다행히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예술을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 역시 해석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오직 예술이 나에게 말 걸어온 순간들, 예술이 나에게 손짓하고 키스하고 껴안는 순간의 온전한 느낌을 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미술 교양서를 읽으며 느끼고 싶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시선이었다는 것을.
둘째, 나는 혼자 외국에 가면 그 지역의 미술관을 찾을 만큼 미술을 좋아하거니와, 책에 소개된 미술가는 내가 종종 미술관이나 도서관에서 자주 찾아보는 작가다.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살바도르 달리, 에드워드 호퍼, 프리다 칼로, 르네 마그리트 등은 미술 입문자라면 한 번쯤 마주했을 작가다. 한데 그가 소개하는 그 미술가들의 그림 이야기를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긴 했지만 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이 창이라면 나는 창만 보았다. 반면 그는 창 너머의 정경을 본 것, 심층을 본 것, 용기를 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겪었다. 그림의 표면이 아니라 그림 속 인생을. 듣는 치유, 쓰는 치유, 만지는 치유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치유’가 나를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셋째, 두 사람이 미술관을 거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을 쓰는 한 사람 옆에 그림을 찍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글을 쓴 정여울 작가고, 다른 한 사람은 사진을 찍은 이승원 작가다. 그림이 아름다움에 관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그림 앞에 선 두 사람 또한 내게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책에 실린 그림 50점은 앞으로 50년을 함께 살아갈 두 사람의 그림처럼 보이거니와, 이 세계에서 부부로 사는 사람은 매 순간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미술관이 있는 땅에는 감수성이 있다. 그곳에는 지옥과 천국, 고통과 희망, 인간과 신화가 있다. 인간의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 무엇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불친절하고 소란스러울지라도 나는 내 마음의 갤러리를 고요히 걷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미술관에 가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낯선 도시를 찾아 헤매고, 마침내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바로 그 그림을 찾아냈을 때, 비로소 눈부신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오늘은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을 거닐며 그림에서 삶의 빛을 끄집어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내가 일하는 출판사는 가회동에 있다. 그곳에서 오 분쯤 걸어가면 조각이나 회화를 쉬이 만날 수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마음이 소란스럽거나 하루가 부서진 뗏목 같을 때 근처에 있는 미술관을 찾는다. 최근에는 김종영미술관에 다녀온 후 그가 한 말을 펜으로 정성껏 옮겨 적었다. “예술은 지혜와 용기, 사랑 없이는 이룰 수 없어요. 만용을 부려서도 안 되고 지혜만 있고 용기가 없어서도 안 돼요. 고독한 길이니까요. 물론 그 바탕에는 사랑이란 윤택한 마음이 있어야지요.” 화집이나 도록을 모으는 나는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이 출간되어 사뭇 반가웠거니와, 이는 세 가지 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가 미술 교양서를 쓸 때 나는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했다. 한 달 전, 어느 서점에서 몇 장을 넘기던 내 손은 맹수처럼 잽싸게 책을 쥐었고, 내 발은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내가 읽고 싶던 책을 어느 편집자가 만들어주어 고마웠다. 그가 써야만 했던 책을 썼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해설하거나 비평하거나 분석한다는 느낌을 다행히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예술을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 역시 해석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오직 예술이 나에게 말 걸어온 순간들, 예술이 나에게 손짓하고 키스하고 껴안는 순간의 온전한 느낌을 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미술 교양서를 읽으며 느끼고 싶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시선이었다는 것을.
둘째, 나는 혼자 외국에 가면 그 지역의 미술관을 찾을 만큼 미술을 좋아하거니와, 책에 소개된 미술가는 내가 종종 미술관이나 도서관에서 자주 찾아보는 작가다.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살바도르 달리, 에드워드 호퍼, 프리다 칼로, 르네 마그리트 등은 미술 입문자라면 한 번쯤 마주했을 작가다. 한데 그가 소개하는 그 미술가들의 그림 이야기를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긴 했지만 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이 창이라면 나는 창만 보았다. 반면 그는 창 너머의 정경을 본 것, 심층을 본 것, 용기를 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겪었다. 그림의 표면이 아니라 그림 속 인생을. 듣는 치유, 쓰는 치유, 만지는 치유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치유’가 나를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셋째, 두 사람이 미술관을 거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을 쓰는 한 사람 옆에 그림을 찍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글을 쓴 정여울 작가고, 다른 한 사람은 사진을 찍은 이승원 작가다. 그림이 아름다움에 관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그림 앞에 선 두 사람 또한 내게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책에 실린 그림 50점은 앞으로 50년을 함께 살아갈 두 사람의 그림처럼 보이거니와, 이 세계에서 부부로 사는 사람은 매 순간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미술관이 있는 땅에는 감수성이 있다. 그곳에는 지옥과 천국, 고통과 희망, 인간과 신화가 있다. 인간의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 무엇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불친절하고 소란스러울지라도 나는 내 마음의 갤러리를 고요히 걷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미술관에 가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낯선 도시를 찾아 헤매고, 마침내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바로 그 그림을 찾아냈을 때, 비로소 눈부신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오늘은 정여울 작가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을 거닐며 그림에서 삶의 빛을 끄집어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