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도검 복원에 50년…"이젠 나만의 칼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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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야철도검 기능전승자 이상선 명장
호랑이 해·달·날·시 만든 '四寅劍'
종묘 영친왕 제사 때 첫눈에 반해
전국 대장간 등 다니며 기술 모아
발주사 부도로 빚더미 오르기도
"밤낮 칼 두드렸지만 힘든 줄 몰라
번듯한 도검박물관 만들고 싶다"
호랑이 해·달·날·시 만든 '四寅劍'
종묘 영친왕 제사 때 첫눈에 반해
전국 대장간 등 다니며 기술 모아
발주사 부도로 빚더미 오르기도
"밤낮 칼 두드렸지만 힘든 줄 몰라
번듯한 도검박물관 만들고 싶다"
사인검(四寅劍)은 12간지의 호랑이 ‘인(寅)’ 자가 네 번 겹치는 호랑이의 해, 달, 날과 시에 제작된 검이다. 호랑이의 기운이 네 번 겹쳐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검으로,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영물로 여겨졌다.
국내 최초 야철도검 장인으로 인정받은 이상선 명장(69·사진)은 12년마다 돌아오는 호랑이의 해에만 만들 수 있는 이 사인검을 36년에 걸쳐 세 번이나 만든 전통도검 전문가다.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전통도검 제작 연구에 몰입해온 이 명장은 경북 문경시에서 고려왕검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명장이 전통도검 연구에 몰두한 계기가 된 게 이 사인검이었다. 전주이씨 15대손인 이 명장은 17세 때 참여한 종묘 영친왕 제사에서 사인검에 매료됐다. 이 명장은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 ‘나도 사인검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사인검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도검 생산의 맥이 끊긴 탓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일본도를 파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전통검을 재현하는 장인이나 공방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인검을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전국 대장간, 공방, 목공소를 찾아다니며 칼날, 칼집, 손잡이 등 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모았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멸시도 이겨내야 했다. 이 명장은 “옛 어른들은 대장장이를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양반 가문 남성이 대장장이 일을 한다며 무시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조각조각 배운 기술들을 종합해 그는 첫 사인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명장은 “처음 만든 사인검은 전통 사인검과 비교해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검을 만들며 가장 뿌듯하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전통 도검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1990년 인천 부평구에 공장을 차렸다. 전통 도검 재현과 더불어 검도용 검까지 생산하면서 한 달에 150개 넘게 판매했다. 공장은 직원 7명을 둘 정도로 커졌다. 이 명장은 “취미로 사인검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오기에서 시작한 일이었다”며 “대장장이를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그는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수중에 귤 한 봉지를 살 1000원도 없을 때가 있었다. 집에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건을 주문한 유통사가 부도나면서 16억원의 빚을 떠안은 시련도 겪었다. 그 빚을 갚는 데만 10년 넘게 걸렸다.
공장에서 잠을 자고 밤낮으로 칼을 두드렸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그는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이 명장은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 몸이 힘든 건 개의치 않았다. 나를 위해 희생한 가족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전통 도검을 연구하고 담금질을 반복하며 그는 전통 도검 전문가이자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2007년 국내 처음으로 전통 야철도검 부문 기능전승자로 선정됐다. 2018년에는 경북 최고 장인에도 뽑혔다.
그는 전통검을 후대에 알리겠다는 목표로 2000년 고려왕검연구소를 세웠다. 학생과 후손들에게 전통 도검을 보여줄 전시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폐교를 활용해 전시장을 만든 탓에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고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강하게 들이쳐 검을 보관하기에 부적합했다. 안전 문제까지 겹치면서 전시관 운영은 중단됐다. 이 명장은 “일본에는 일본도를 200년 넘게 가르치는 학교만 네 곳 있고 전국에 무사 가문에 내려오는 검을 전시한 소규모 박물관이 많다”며 “우리나라에도 번듯한 도검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전통 계승에 평생을 바친 그는 이제 자신만의 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과거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검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내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은 복원만 하다 죽었다’고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선시대의 검이 아니라 나만의 작품으로 후대에 기억되길 바랍니다.”
문경=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국내 최초 야철도검 장인으로 인정받은 이상선 명장(69·사진)은 12년마다 돌아오는 호랑이의 해에만 만들 수 있는 이 사인검을 36년에 걸쳐 세 번이나 만든 전통도검 전문가다.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전통도검 제작 연구에 몰입해온 이 명장은 경북 문경시에서 고려왕검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명장이 전통도검 연구에 몰두한 계기가 된 게 이 사인검이었다. 전주이씨 15대손인 이 명장은 17세 때 참여한 종묘 영친왕 제사에서 사인검에 매료됐다. 이 명장은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 ‘나도 사인검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사인검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도검 생산의 맥이 끊긴 탓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일본도를 파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전통검을 재현하는 장인이나 공방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인검을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전국 대장간, 공방, 목공소를 찾아다니며 칼날, 칼집, 손잡이 등 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모았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멸시도 이겨내야 했다. 이 명장은 “옛 어른들은 대장장이를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양반 가문 남성이 대장장이 일을 한다며 무시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조각조각 배운 기술들을 종합해 그는 첫 사인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명장은 “처음 만든 사인검은 전통 사인검과 비교해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검을 만들며 가장 뿌듯하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전통 도검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1990년 인천 부평구에 공장을 차렸다. 전통 도검 재현과 더불어 검도용 검까지 생산하면서 한 달에 150개 넘게 판매했다. 공장은 직원 7명을 둘 정도로 커졌다. 이 명장은 “취미로 사인검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오기에서 시작한 일이었다”며 “대장장이를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그는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수중에 귤 한 봉지를 살 1000원도 없을 때가 있었다. 집에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건을 주문한 유통사가 부도나면서 16억원의 빚을 떠안은 시련도 겪었다. 그 빚을 갚는 데만 10년 넘게 걸렸다.
공장에서 잠을 자고 밤낮으로 칼을 두드렸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그는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이 명장은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 몸이 힘든 건 개의치 않았다. 나를 위해 희생한 가족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전통 도검을 연구하고 담금질을 반복하며 그는 전통 도검 전문가이자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2007년 국내 처음으로 전통 야철도검 부문 기능전승자로 선정됐다. 2018년에는 경북 최고 장인에도 뽑혔다.
그는 전통검을 후대에 알리겠다는 목표로 2000년 고려왕검연구소를 세웠다. 학생과 후손들에게 전통 도검을 보여줄 전시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폐교를 활용해 전시장을 만든 탓에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고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강하게 들이쳐 검을 보관하기에 부적합했다. 안전 문제까지 겹치면서 전시관 운영은 중단됐다. 이 명장은 “일본에는 일본도를 200년 넘게 가르치는 학교만 네 곳 있고 전국에 무사 가문에 내려오는 검을 전시한 소규모 박물관이 많다”며 “우리나라에도 번듯한 도검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전통 계승에 평생을 바친 그는 이제 자신만의 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과거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검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내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은 복원만 하다 죽었다’고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선시대의 검이 아니라 나만의 작품으로 후대에 기억되길 바랍니다.”
문경=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