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업한 모든 책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나 시집, 연구서 등이었지만, 솔직히 가끔은 아동서 편집자가 부러울 때가 있다. 담담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그림과 짧지만 인상적인 텍스트로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를 볼 때 특히 그랬다. 그래서 도서전에 갔을 때 책을 열자마자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책도 보통 아동서다. 책을 열고 한 줄씩 (가끔은 소리 내어) 읽어갈 때면 마음도 저절로 어린 시절을 향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그리운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책, '할머니의 여름휴가'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2016년에 책이 나온 뒤로 그동안 다섯 권 정도 샀던 것 같다. (창비어린이팀 보고 계신가요?) 나도 한 권 가지고 있고, 여기저기 선물을 많이 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도 보내고, 할머니를 잃은 친구에게도 전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나도 이 책을 다시 열어본다.

혼자 집에서 여름을 보내던 할머니에게 바닷가에 다녀온 손자가 소라딱지를 건넨다. 무덥던 어느 날 그 안에서 튀어나온 빨간 소라게를 따라 들어가니 해변이 펼쳐진다. 할머니는 오래된 수영복을 꺼내 입고, 강아지와 함께 수박을 나눠 먹으며 바닷가에서의 한낮을 즐긴다. 이 짧은 이야기는 할머니의 가족사나 일생에 대해 다루지 않고 다소 환상적으로 며칠간의 여정을 다루지만 그래서인지 더 읽는 이 각자의 기억에 가닿고 따뜻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불어넣는다.

한국의 많은 할머니가 그랬듯 나의 할머니도 생애 대부분을 돌봄노동과 경제활동으로 보냈다. 자신의 어머니와 불과 열네 살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할머니는 다섯 명의 어린 동생을 돌보며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 불리던 시절에 값하듯 서울의 한 맥주 공장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했다. 그때는 급여를 식료품으로 받기도 해서 급여 날에는 마당에 쌀과 통조림이 쌓였다고 어린 내게 자랑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3년간 연애하며 당시 개봉한 모든 영화를 섭렵하고 함께 사교춤도 배웠지만, 결혼 후에는 몰락한 정미소집 아들과의 생활이 녹록지 않아 지방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 남편을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와 아이들을 키우며 양장점을 운영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시기, 빚을 잔뜩 지고 집을 나갔던 시아버지가 불현듯 돌아왔고, 육아와 봉양을 모두 맡았다.

이후에는 맞벌이인 막내딸 대신 나와 내 동생을 키워냈고, 치매를 앓는 시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15년 뒤에는 같은 병을 앓는 남편을 돌봤다. 모두가 집을 떠난 뒤에는 10년간 혼자 살았고 봄날 같던 훈훈한 겨울 어느 날 자신도 훌훌 떠났다.
오키나와(c최지인)
오키나와(c최지인)
해변에 누워 몸을 태우고 바닷바람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7년 전 오키나와에서 수영하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경증의 치매를 앓게 된 뒤로 30년간 다니던 수영장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무렵이었다.

수영모와 수경까지 착용하고 쉼 없이 바다를 누비던 할머니는 어른거리는 윤슬에 어지러워 넘어지기도 했지만 “이제야 몸이 풀린다”며 활짝 웃었다. 물속에서 외로움과 무료함을 털어내던 할머니가 이제는 완전한 자유 안에서 헤엄치는 시간을 맞았기를 빌며, 이 순간 가장 위로가 되어준 이 책을 닫고 다시 출근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