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우리 곁을 떠난 예술가들,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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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진 별들, 다시 읽는 부고
<10명의 예술가가 남긴 10개의 문장들>
<10명의 예술가가 남긴 10개의 문장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단 하나, 남겨진 이야기를 빼고. 그래서 누군가의 삶을 쓰고, 말하고, 기록하는 일은 어쩌면 한 나절의 장례식이나 거장한 비석을 세우는 일보다 더 의미있는 일일 지 모른다.
올해도 수 많은 별이 졌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은 삶에서 가장 큰 고통임에 틀림없지만, 예술가들의 그것은 때로 새로운 차원의 '생(生)'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들이 남긴 음악과 영화, 글과 그림과 사진,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새로운 생각들은 시간과 세대를 거슬러 작품으로서 영원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2023년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말들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 했다. "밤이 깊어지면 아침이 빨리 온다"던 음악가 조지 윈스턴, "나는 다시 살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고 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지금 두려운가. 다시 기쁨에 모험을 걸자"던 시인 루이스 글릭.
인간이기에 가졌던 유한함, 그리고 이를 극복해낸 성찰도 담겨 있다. "무언가 세상에 내놓으려면 수십 번은 편집을 거쳐야 한다"던 세계적 설치미술가 로버트 어윈, "인생은 충분히 오래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려준다"던 전설의 재즈 보컬 토니 베넷. 그리고 이 시대에 많은 영감을 남기고 간 사카모토 류이치의 말-"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까지.
1년 동안 우리가 떠나보낸 20명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사진, 영상과 함께 정리했다. 그리고 이곳에 다 담지 못한, 하늘의 별이 된 수 많은 스타들에게 전한다.
R.I.P.(Rest In Peace). ① 사카모토 류이치 (1952. 1.17~2023.3.28)
사카모토 류이치는 하나의 수식어로 떠나 보내기에 한없이 부족한 예술가였다. 영화음악의 대가이자 전위음악가, 미디어아트 작가, 사회운동가 등 여러 방면에서 자취를 남긴 시대의 거장이었다.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유치원생 때 토끼를 소재로 작곡할만큼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도쿄예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미술학부 친구들과 더 많이 어울렸다. 쇤베르크, 백남준 등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 받은 사카모토는 세계적인 3인조 일렉트로닉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를 결성했다. 팝과 로큰롤 기반의 전자음악과 클래식,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결합했고, 그의 혁신적인 음악은 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화음악 작곡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 이어 영화 ‘마지막 황제’(1986)의 음악을 맡아 이듬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1992년 작곡한 바르셀로나 올림픽 테마곡은 세계적 음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레인' 등 수많은 명곡이 남았다.
그는 다른 음악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롤링스톤스의 전위성, 비틀즈의 화성적 세련미에 충격을 받았고 드뷔시에 특별히 매료됐다고도 했다. 드뷔시의 혁신성에 매료돼 스스로를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오랫동안 믿기도 했다고.
사카모토는 2014년 비인두암 판정을 받은 뒤 복귀했지만 2020년 6월 다시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YMO의 멤버 중 드러머이자 보컬리스트인 다카하시 유키히로도 사카모토가 떠나기 두 달여 전인 올해 1월 11일 눈을 감았다. ② 박서보 (1931.11.15~2023.10.14)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추상의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는 1950년대 국내 주요 추상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1960년대부터 연필로 도를 닦듯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묘법’ 시리즈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개척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이란 현대미술 운동을 촉발해 한국 현대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묘법 작품을 ‘수신(修身)의 미술이자 보는 이를 치유하는 미술’로 불렀다. 한국 화단의 주요 작가였지만, 오랫동안 상업적인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수십년간 수행하듯 선을 그으며 작품을 갈고 닦았다.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봤고,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작가가 됐다. 올해 초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지난 2월 박 화백은 폐암 3기 판정 받은 사실을 처음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부탁하건대 안부 전화하지 마라.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③ 밀란 쿤데라 (1929.4.1~2023.7.11)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찾는다. 이데올로기, 신앙, 사랑 등 무거운 주제들을 놓고 자기 존재 이유를 성찰한다. 모든 걸 내려놓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한없이 가벼워진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철학적 사유만이 묘비명으로 남아 묵직하게 땅에 뿌리 내린다.
지난 7월 타계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의 묘비명 같은 소설이다. 책은 네 명의 남녀를 통해 삶의 무게를 벗겨내지만, 그 속에서도 인생의 진지한 구석들을 발견한다. 죽음이 이 모든 과정의 경계라는 의미일까. 쿤데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묘비명은 존재와 망각의 환승역"이라고 말한다.
쿤데라는 소련의 간섭에 시달리던 체코에서 1929년 태어났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지만, 그 봄을 짓밟은 소련군에 의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농담> 등 그의 대표작들은 1989년 체코에서 공산주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나서야 해금됐다.
망명 작가라는 타이틀 때문에 '자유주의의 기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정작 쿤데라는 그의 작품들이 이데올로기 소설로 일축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실존의 문제를 은폐한다"며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강조했다. 향년 94세에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사생활을 극비에 부친 만큼, 아직 쿤데라의 묘비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④ 조지 윈스턴 (1949.2.11 ~2023.6.4)
1980~1990년대 뉴에이지 음악의 새 지평을 연 음악가. 조지 윈스턴은 그러나 “나를 뉴에이지 범주에 넣지 말라”며 ‘전원 포크(rural folk) 피아니스트’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의 음악은 자연을 닮았다. 1949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몬태나, 미시시피를 거쳐 플로리다에 살았던 그는 대학 자퇴 후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마스터했고, 기타와 하모니카 등 많은 악기를 두루 다뤘다.
1972년 첫 솔로 앨범 '발라드 앤 블루스'을 낸 그는 1980년 ‘가을’과 1982년 ‘겨울에서 봄으로' 등 계절을 주제로 한 음반을 냈다. 이들 앨범은 각각 100만장 이상 팔렸고, 1982년 발매한 ‘디셈버(December)’는 300만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1994년 ‘포레스트’로 자연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고, 이 앨범은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6개 음반을 1500만장 이상 판매한 그이지만 일상은 수도자와 같았다. “동굴에서 나와 연주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연주를 잘하기 위해 동굴에 산다”고 말해온 그는 파티에 가본 적도, 사람들과 어울린 적도 별로 없었다.
한국에는 1995년 서울시향, 정명훈과 협연하며 대중에게 크게 알려졌고, 이후 10번이나 방한했다. 음반 ‘디셈버’의 총판매량 300만장 중 100만장이 한국에서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고, 이에 화답하듯 ‘플레인즈’(1999) 앨범엔 ‘아리랑’을 보너스 트랙으로 넣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깊은 정서를 좋아한다”고 말한 그는 1998년 방한 때 외환위기 극복에 보탬이 되고자 출연료 전액을 ‘실직자를 위한 기금’으로 쾌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크루즈에 살았던 윈스턴은 혈액암 판정을 받고 지난 2013년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후 10년 간 투병해왔다. 자연을 사랑했던 피아니스트는 영원한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 음악 인생 50주년 기념해 지난해 발매한 음반의 제목을 ‘밤(Night)’이라고 했다. “어둠이 깊어질 때마다 아침은 더 빨리 다가왔다”며. ⑤ 페르난도 보테로 (1932.4.19~ 2023.9.15)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그는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삼촌의 권유로 투우사 양성학교에 입학했는데, 틈틈이 그림을 익혀 1948년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 인생을 시작했다. 스무 살에 유럽으로 건너간 뒤에는 벨라스케스,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12세의 모나리자’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르네상스 명화를 비틀며 자신의 스타일을 굳혔다. 미술사의 명작들에 부여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고선 거장들에 대한 '경의'라고 표현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의 경지를 개척해온 보테로는 피카소와 함께 평가되면서 '남미의 피카소'라는 별칭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고향인 콜롬비아 보고타는 2022년을 '보테로의 해'로 지정했다.
보테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기를 넣은 풍선처럼 잔뜩 부풀려진 작품 속 인물들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작은 눈코입, 터질 듯 통통한 볼살과 몸집을 하고 있다. 밝고 다채로운 색감이 사용된다는 것도 보테로 작품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남미 특유의 다채로운 색감과 풍만함, 유머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테로는 사망 한두 해 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비례에 대한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 그는 때론 희화화한 모습으로 삶의 단면을 표현해 우리 삶 속에 숨겨진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포로 학대를 생생하게 고발하는 이라크판 ‘게르니카’를 2005년 완성했다. ⑥ 오에 겐자부로 (1935. 1.31~ 2023.3.3 )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1963년 여름, 월간지 세카이의 의뢰로 ‘제9회 원자력폭탄·수소폭탄 금지 세계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처음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장애를 안고 갓 태어난 첫아들이 빈사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피폭자들을 만났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불과 스물두살의 나이에 유명 작가가 된 그에게 히로시마 방문은 전환점이 됐다.
그는 히로시마에서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캠페인을 벌일 것, 불편한 것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것이었다. 일본에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를 통해 일본 사회가 외면했던 히로시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은 미국 원폭 투하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희생자임을 분명히 했다. 여러 글을 통해 재일한국인, 강제 노동자,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고 보상을 호소했다.
1994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가”라고 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그의 당부는 마지막 소설 <만년 양식집>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⑦ 김남윤 (1949.9.20~2023.3.12)
양인모, 임지영, 클라라 주미 강…. 50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세계 무대를 제패할 수 있었던 뒷배가 바로 ‘한국 바이올린 대모’ 김남윤이었다. 과언이 아니다. 명문 콩쿠르에서 정상을 차지한 젊은 연주자부터 중견 연주자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는 국내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예고와 미국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그는 1974년 세계적인 권위의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경희대와 서울대 교수로 일하던 중인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창설 멤버로 합류했고, 이후 40여년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1년 한국인 연주자로는 최초로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이후 파가니니 콩쿠르·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국제적 권위의 대회에서 줄곧 심사위원을 맡아왔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난파음악상, 금호음악스승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그의 각별한 제자 사랑은 유명했다. 혈액암으로 투병한 그는 별세하기 한 달 전까지도 한예종 산하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밥을 굶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거르는 법이 없었고, 때론 호랑이 선생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수십 년간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이틀이면 비평가가 알며, 사흘이 되면 청중이 알게 된다.” ⑧ 어윈 올라프 (1959.7.2~2023.9.20)
어윈 올라프는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중 한 명이자 네덜란드의 국민예술가였다. 극사실주의 회화와 같은 연출과 색감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 사진 작가로 전업한 그는 1988년 '체스맨 시리즈'로 '유럽 젊은 사진작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예술가 반열에 올랐다.
올라프의 시선은 전 세계 낮은 곳과 높은 곳을 모두 향했다. 올라프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포함해 사회의 소외된 개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업을 벌였다. 그의 작품 500점은 2019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컬렉션에 추가되기도 했다.
2018년 세계 주요 도시의 지진 변화 기간, 거대한 도시 속 사람들을 묘사하는 기념비적인 사진과 영화 3부작을 완성했다. 복잡한 인종 관계, 경제적 분열의 황폐화, 성욕의 합병증을 묘사했다. 올라프는 1980년대 암스테르담의 유흥 문화 속에서 에이즈 이전의 게이 해방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 40년 동안 평등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전해왔다.
그는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는 물론 세계적인 미술관들과 두루 협업했다. 2017년에는 네덜란드 왕실의 공식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빌럼-알렉산더 왕의 초상을 담은 유로화 동전을 디자인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올라프는 격리와 단절이 계속되는 시간을 묘사한 '만우절(April fool)' 연작을 내놨다.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숲속에서'(Im Wald) 연작은 만년의 걸작으로 남았다. 선천성 폐 질환이 있던 올라프는 폐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⑨ 제인 버킨 (1946.12.14~2023.7.16 )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으로 잘 알려진 그 이름. 하지만 그의 예술적 여정은 가방의 이름 정도로 기억하기에 거대한 포물선을 그린 것처럼 크고 넓었다. 1970년대 반전 시위와 히피즘의 상징으로, 말년엔 동물 보호 등 사회 운동가로 활약했다.
2021년 14번째 앨범을 냈고 2018년에는 월드투어를 하는 등 최근까지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프렌치 시크의 아이콘으로, 패션계의 뮤즈로, 세르주 갱스브루와 펼쳐낸 세기의 로맨스로, 지난 세기의 '영원한 뮤즈'로 남았다.
1946년 영국 런던에서 해군 장교의 딸로 태어난 버킨은 1965년 배우로 데뷔, 단역 모델로도 활동하다 프랑스로 건너갔다. 전국적인 반정부 학생시위로 혼란스럽던 1968년 프랑스 샹송 음악의 거장이자 배우였던 세르주 갱스부르와 영화 촬영 중 만나 스무 살 차이를 극복하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후 13년 간 결혼을 하지 않고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수 많은 음악을 남겼다.
버킨은 부서질듯 가녀린 음색과 살짝 떨리는 음정, 그 사이를 채우는 허스키한 가성으로 프랑스 여가수를 상징하는 목소리로 기억된다. 평소의 성격과 스타일처럼, 그의 노래 역시 어떤 가식과 꾸밈도 없이 솔직하고 겸손한 매력으로 가득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불규칙하게 잘라 내린 앞머리와 헝클어진 긴 머리가 대명사였던 그는 ‘파리지앵 스타일’의 교본처럼 남았다. ⑩ 아마드 자말 (1930. 7.2~ 2023.4.16)
아마드 자말은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1958년 발매된 ‘퍼싱에서의 아마드 자말’ 앨범은 그해 4만7000장이 팔렸다. 재즈 앨범이 1만5000장만 팔려도 ‘대박’이라던 때였다. 2020년 2월, 자말은 자신의 90세 생일을 앞두고 뉴욕 링컨센터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최고령 재즈 피아니스트의 공개 연주 중 하나로 기록된다.
자말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철강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웠고, 일곱 살 때 정식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의 유년기는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이 장악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줄리어드 음악원 대신 직업 연주자가 된 그는 1950년 시카고에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컬럼비아 레코드의 유명 프로듀서 존 해먼드의 눈에 띄었다. 그가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콜롬비아 레코드 산하의 레이블인 오케이와 에픽에서 녹음한 것들을 모은 ‘전설의 오케이, 에픽 녹음들’은 재즈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반으로 남았다.
젊은 시절 그의 경이로운 연주와 즉흥성, 영롱했던 피아노 연주 실력은 60대에 들어 더 활짝 꽃피웠다. 60대에 프랑스 드레퓌스에서 했던 연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의 모든 영감은 자말에게서 온 것이다”이라고 했고, 키스 자렛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그를 꼽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아직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했다. 만년의 그는 “어디서든 피아노 앞을 지나갈 때 여전히 건반을 두드린다. 음악가에 대한 보상은 돈이 아니다. 그 보상은 연주의 절정에서 느끼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멋진 영적인 느낌”이라고 했다.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이야말로 ‘궁극의 자유’라고 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문명은 문화 없이는 지속되거나 발전할 수 없다.”
김보라·임근호·안시욱·성수영·최다은·김수현 기자
올해도 수 많은 별이 졌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은 삶에서 가장 큰 고통임에 틀림없지만, 예술가들의 그것은 때로 새로운 차원의 '생(生)'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들이 남긴 음악과 영화, 글과 그림과 사진,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새로운 생각들은 시간과 세대를 거슬러 작품으로서 영원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2023년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말들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 했다. "밤이 깊어지면 아침이 빨리 온다"던 음악가 조지 윈스턴, "나는 다시 살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고 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지금 두려운가. 다시 기쁨에 모험을 걸자"던 시인 루이스 글릭.
인간이기에 가졌던 유한함, 그리고 이를 극복해낸 성찰도 담겨 있다. "무언가 세상에 내놓으려면 수십 번은 편집을 거쳐야 한다"던 세계적 설치미술가 로버트 어윈, "인생은 충분히 오래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알려준다"던 전설의 재즈 보컬 토니 베넷. 그리고 이 시대에 많은 영감을 남기고 간 사카모토 류이치의 말-"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까지.
1년 동안 우리가 떠나보낸 20명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사진, 영상과 함께 정리했다. 그리고 이곳에 다 담지 못한, 하늘의 별이 된 수 많은 스타들에게 전한다.
R.I.P.(Rest In Peace). ① 사카모토 류이치 (1952. 1.17~2023.3.28)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 "
사카모토 류이치는 하나의 수식어로 떠나 보내기에 한없이 부족한 예술가였다. 영화음악의 대가이자 전위음악가, 미디어아트 작가, 사회운동가 등 여러 방면에서 자취를 남긴 시대의 거장이었다.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유치원생 때 토끼를 소재로 작곡할만큼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도쿄예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미술학부 친구들과 더 많이 어울렸다. 쇤베르크, 백남준 등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 받은 사카모토는 세계적인 3인조 일렉트로닉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를 결성했다. 팝과 로큰롤 기반의 전자음악과 클래식,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결합했고, 그의 혁신적인 음악은 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화음악 작곡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 이어 영화 ‘마지막 황제’(1986)의 음악을 맡아 이듬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1992년 작곡한 바르셀로나 올림픽 테마곡은 세계적 음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레인' 등 수많은 명곡이 남았다.
그는 다른 음악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롤링스톤스의 전위성, 비틀즈의 화성적 세련미에 충격을 받았고 드뷔시에 특별히 매료됐다고도 했다. 드뷔시의 혁신성에 매료돼 스스로를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오랫동안 믿기도 했다고.
사카모토는 2014년 비인두암 판정을 받은 뒤 복귀했지만 2020년 6월 다시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YMO의 멤버 중 드러머이자 보컬리스트인 다카하시 유키히로도 사카모토가 떠나기 두 달여 전인 올해 1월 11일 눈을 감았다. ② 박서보 (1931.11.15~2023.10.14)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추상의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는 1950년대 국내 주요 추상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1960년대부터 연필로 도를 닦듯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묘법’ 시리즈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개척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이란 현대미술 운동을 촉발해 한국 현대미술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묘법 작품을 ‘수신(修身)의 미술이자 보는 이를 치유하는 미술’로 불렀다. 한국 화단의 주요 작가였지만, 오랫동안 상업적인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수십년간 수행하듯 선을 그으며 작품을 갈고 닦았다.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봤고,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작가가 됐다. 올해 초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지난 2월 박 화백은 폐암 3기 판정 받은 사실을 처음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부탁하건대 안부 전화하지 마라.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③ 밀란 쿤데라 (1929.4.1~2023.7.11)
“내 일생의 야망은 최대한의 진지함과 최대한의 가벼운 형식을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찾는다. 이데올로기, 신앙, 사랑 등 무거운 주제들을 놓고 자기 존재 이유를 성찰한다. 모든 걸 내려놓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한없이 가벼워진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철학적 사유만이 묘비명으로 남아 묵직하게 땅에 뿌리 내린다.
지난 7월 타계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의 묘비명 같은 소설이다. 책은 네 명의 남녀를 통해 삶의 무게를 벗겨내지만, 그 속에서도 인생의 진지한 구석들을 발견한다. 죽음이 이 모든 과정의 경계라는 의미일까. 쿤데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묘비명은 존재와 망각의 환승역"이라고 말한다.
쿤데라는 소련의 간섭에 시달리던 체코에서 1929년 태어났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지만, 그 봄을 짓밟은 소련군에 의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농담> 등 그의 대표작들은 1989년 체코에서 공산주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나서야 해금됐다.
망명 작가라는 타이틀 때문에 '자유주의의 기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정작 쿤데라는 그의 작품들이 이데올로기 소설로 일축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실존의 문제를 은폐한다"며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강조했다. 향년 94세에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사생활을 극비에 부친 만큼, 아직 쿤데라의 묘비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④ 조지 윈스턴 (1949.2.11 ~2023.6.4)
“사계절은 나의 영감(靈感)이다. 나는 그 영감을 보관하는 도서관 사서(司書)일 뿐이다.”
1980~1990년대 뉴에이지 음악의 새 지평을 연 음악가. 조지 윈스턴은 그러나 “나를 뉴에이지 범주에 넣지 말라”며 ‘전원 포크(rural folk) 피아니스트’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의 음악은 자연을 닮았다. 1949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몬태나, 미시시피를 거쳐 플로리다에 살았던 그는 대학 자퇴 후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마스터했고, 기타와 하모니카 등 많은 악기를 두루 다뤘다.
1972년 첫 솔로 앨범 '발라드 앤 블루스'을 낸 그는 1980년 ‘가을’과 1982년 ‘겨울에서 봄으로' 등 계절을 주제로 한 음반을 냈다. 이들 앨범은 각각 100만장 이상 팔렸고, 1982년 발매한 ‘디셈버(December)’는 300만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1994년 ‘포레스트’로 자연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고, 이 앨범은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6개 음반을 1500만장 이상 판매한 그이지만 일상은 수도자와 같았다. “동굴에서 나와 연주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연주를 잘하기 위해 동굴에 산다”고 말해온 그는 파티에 가본 적도, 사람들과 어울린 적도 별로 없었다.
한국에는 1995년 서울시향, 정명훈과 협연하며 대중에게 크게 알려졌고, 이후 10번이나 방한했다. 음반 ‘디셈버’의 총판매량 300만장 중 100만장이 한국에서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고, 이에 화답하듯 ‘플레인즈’(1999) 앨범엔 ‘아리랑’을 보너스 트랙으로 넣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깊은 정서를 좋아한다”고 말한 그는 1998년 방한 때 외환위기 극복에 보탬이 되고자 출연료 전액을 ‘실직자를 위한 기금’으로 쾌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크루즈에 살았던 윈스턴은 혈액암 판정을 받고 지난 2013년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후 10년 간 투병해왔다. 자연을 사랑했던 피아니스트는 영원한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 음악 인생 50주년 기념해 지난해 발매한 음반의 제목을 ‘밤(Night)’이라고 했다. “어둠이 깊어질 때마다 아침은 더 빨리 다가왔다”며. ⑤ 페르난도 보테로 (1932.4.19~ 2023.9.15)
"예술은 오아시스, 삶의 고단함으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이자 피난처여야 한다."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그는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삼촌의 권유로 투우사 양성학교에 입학했는데, 틈틈이 그림을 익혀 1948년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 인생을 시작했다. 스무 살에 유럽으로 건너간 뒤에는 벨라스케스,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12세의 모나리자’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르네상스 명화를 비틀며 자신의 스타일을 굳혔다. 미술사의 명작들에 부여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고선 거장들에 대한 '경의'라고 표현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의 경지를 개척해온 보테로는 피카소와 함께 평가되면서 '남미의 피카소'라는 별칭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고향인 콜롬비아 보고타는 2022년을 '보테로의 해'로 지정했다.
보테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기를 넣은 풍선처럼 잔뜩 부풀려진 작품 속 인물들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작은 눈코입, 터질 듯 통통한 볼살과 몸집을 하고 있다. 밝고 다채로운 색감이 사용된다는 것도 보테로 작품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남미 특유의 다채로운 색감과 풍만함, 유머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테로는 사망 한두 해 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비례에 대한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 그는 때론 희화화한 모습으로 삶의 단면을 표현해 우리 삶 속에 숨겨진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포로 학대를 생생하게 고발하는 이라크판 ‘게르니카’를 2005년 완성했다. ⑥ 오에 겐자부로 (1935. 1.31~ 2023.3.3 )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1963년 여름, 월간지 세카이의 의뢰로 ‘제9회 원자력폭탄·수소폭탄 금지 세계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처음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장애를 안고 갓 태어난 첫아들이 빈사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피폭자들을 만났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불과 스물두살의 나이에 유명 작가가 된 그에게 히로시마 방문은 전환점이 됐다.
그는 히로시마에서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캠페인을 벌일 것, 불편한 것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것이었다. 일본에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를 통해 일본 사회가 외면했던 히로시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은 미국 원폭 투하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희생자임을 분명히 했다. 여러 글을 통해 재일한국인, 강제 노동자,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고 보상을 호소했다.
1994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가”라고 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그의 당부는 마지막 소설 <만년 양식집>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⑦ 김남윤 (1949.9.20~2023.3.12)
“몸과 마음을 다하여 될 때까지.”
양인모, 임지영, 클라라 주미 강…. 50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한국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세계 무대를 제패할 수 있었던 뒷배가 바로 ‘한국 바이올린 대모’ 김남윤이었다. 과언이 아니다. 명문 콩쿠르에서 정상을 차지한 젊은 연주자부터 중견 연주자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는 국내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예고와 미국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그는 1974년 세계적인 권위의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경희대와 서울대 교수로 일하던 중인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창설 멤버로 합류했고, 이후 40여년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1년 한국인 연주자로는 최초로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이후 파가니니 콩쿠르·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국제적 권위의 대회에서 줄곧 심사위원을 맡아왔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난파음악상, 금호음악스승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그의 각별한 제자 사랑은 유명했다. 혈액암으로 투병한 그는 별세하기 한 달 전까지도 한예종 산하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밥을 굶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거르는 법이 없었고, 때론 호랑이 선생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수십 년간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이틀이면 비평가가 알며, 사흘이 되면 청중이 알게 된다.” ⑧ 어윈 올라프 (1959.7.2~2023.9.20)
"보여주지 않는 것이 때론 더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어윈 올라프는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중 한 명이자 네덜란드의 국민예술가였다. 극사실주의 회화와 같은 연출과 색감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 사진 작가로 전업한 그는 1988년 '체스맨 시리즈'로 '유럽 젊은 사진작가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예술가 반열에 올랐다.
올라프의 시선은 전 세계 낮은 곳과 높은 곳을 모두 향했다. 올라프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포함해 사회의 소외된 개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업을 벌였다. 그의 작품 500점은 2019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컬렉션에 추가되기도 했다.
2018년 세계 주요 도시의 지진 변화 기간, 거대한 도시 속 사람들을 묘사하는 기념비적인 사진과 영화 3부작을 완성했다. 복잡한 인종 관계, 경제적 분열의 황폐화, 성욕의 합병증을 묘사했다. 올라프는 1980년대 암스테르담의 유흥 문화 속에서 에이즈 이전의 게이 해방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 40년 동안 평등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전해왔다.
그는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는 물론 세계적인 미술관들과 두루 협업했다. 2017년에는 네덜란드 왕실의 공식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빌럼-알렉산더 왕의 초상을 담은 유로화 동전을 디자인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올라프는 격리와 단절이 계속되는 시간을 묘사한 '만우절(April fool)' 연작을 내놨다.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숲속에서'(Im Wald) 연작은 만년의 걸작으로 남았다. 선천성 폐 질환이 있던 올라프는 폐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⑨ 제인 버킨 (1946.12.14~2023.7.16 )
"누가 편안한 삶을 원해? 그건 지루하잖아!”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으로 잘 알려진 그 이름. 하지만 그의 예술적 여정은 가방의 이름 정도로 기억하기에 거대한 포물선을 그린 것처럼 크고 넓었다. 1970년대 반전 시위와 히피즘의 상징으로, 말년엔 동물 보호 등 사회 운동가로 활약했다.
2021년 14번째 앨범을 냈고 2018년에는 월드투어를 하는 등 최근까지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프렌치 시크의 아이콘으로, 패션계의 뮤즈로, 세르주 갱스브루와 펼쳐낸 세기의 로맨스로, 지난 세기의 '영원한 뮤즈'로 남았다.
1946년 영국 런던에서 해군 장교의 딸로 태어난 버킨은 1965년 배우로 데뷔, 단역 모델로도 활동하다 프랑스로 건너갔다. 전국적인 반정부 학생시위로 혼란스럽던 1968년 프랑스 샹송 음악의 거장이자 배우였던 세르주 갱스부르와 영화 촬영 중 만나 스무 살 차이를 극복하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후 13년 간 결혼을 하지 않고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수 많은 음악을 남겼다.
버킨은 부서질듯 가녀린 음색과 살짝 떨리는 음정, 그 사이를 채우는 허스키한 가성으로 프랑스 여가수를 상징하는 목소리로 기억된다. 평소의 성격과 스타일처럼, 그의 노래 역시 어떤 가식과 꾸밈도 없이 솔직하고 겸손한 매력으로 가득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불규칙하게 잘라 내린 앞머리와 헝클어진 긴 머리가 대명사였던 그는 ‘파리지앵 스타일’의 교본처럼 남았다. ⑩ 아마드 자말 (1930. 7.2~ 2023.4.16)
“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피아노에 앉을 때마다 내게는 아직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아마드 자말은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1958년 발매된 ‘퍼싱에서의 아마드 자말’ 앨범은 그해 4만7000장이 팔렸다. 재즈 앨범이 1만5000장만 팔려도 ‘대박’이라던 때였다. 2020년 2월, 자말은 자신의 90세 생일을 앞두고 뉴욕 링컨센터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최고령 재즈 피아니스트의 공개 연주 중 하나로 기록된다.
자말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철강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웠고, 일곱 살 때 정식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의 유년기는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이 장악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줄리어드 음악원 대신 직업 연주자가 된 그는 1950년 시카고에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컬럼비아 레코드의 유명 프로듀서 존 해먼드의 눈에 띄었다. 그가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콜롬비아 레코드 산하의 레이블인 오케이와 에픽에서 녹음한 것들을 모은 ‘전설의 오케이, 에픽 녹음들’은 재즈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반으로 남았다.
젊은 시절 그의 경이로운 연주와 즉흥성, 영롱했던 피아노 연주 실력은 60대에 들어 더 활짝 꽃피웠다. 60대에 프랑스 드레퓌스에서 했던 연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의 모든 영감은 자말에게서 온 것이다”이라고 했고, 키스 자렛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그를 꼽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아직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했다. 만년의 그는 “어디서든 피아노 앞을 지나갈 때 여전히 건반을 두드린다. 음악가에 대한 보상은 돈이 아니다. 그 보상은 연주의 절정에서 느끼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멋진 영적인 느낌”이라고 했다.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이야말로 ‘궁극의 자유’라고 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문명은 문화 없이는 지속되거나 발전할 수 없다.”
김보라·임근호·안시욱·성수영·최다은·김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