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白樺)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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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자작나무 껍질로 밝힌 화촉 [고두현의 아침 시편]
제목의 ‘백화(白樺)’는 껍질이 흰 자작나무를 가리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작나무 숲이 떠오르는군요. 눈부신 설원의 은빛 장관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아쉽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산간에서만 볼 수 있지요. 인제 자작나무숲은 1990년대 초부터 인공림으로 키운 것입니다.

백석은 이 시에서 산골집과 장작과 박우물 등 모든 게 자작나무라고 노래했습니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어디일까요. 그가 이 시를 쓴 장소는 함경남도 함주군입니다. 남동쪽으로 동해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는 이곳은 산지마다 자작나무숲이 울창한 지역이지요.

자작나무는 시베리아와 만주, 한반도 북부 지역의 혹한을 얇은 껍질로 견딥니다. 흰 껍질이 여러 겹이고 기름 성분이 풍부해서 나무의 속살은 얼지 않죠.

윤기 나는 껍질은 종이처럼 얇게 벗겨집니다.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오래가지요. 신혼 방을 밝히는 화촉(華燭)이나 결혼식에 쓰는 화혼(華婚)이 여기서 온 말입니다. 자작나무 껍질로 호롱불을 밝히면 밤새 불타는 소리가 ‘자작자작’ 난다고 합니다. 이는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죠.

옛날엔 종이를 대신해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습니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것이죠.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리는 장니(障泥)에 그린 이 그림은 자작나무 껍질을 좌우에서 여러 겹 빗금으로 누비고 그 위에 광물 채색을 한 것입니다.

발굴 당시 그림판이 썩지 않고 빛깔도 선명해서 모두가 놀랐다고 하죠. 김정기 발굴단장은 “1500년 된 나무껍질에 그린 작품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목재는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결이 곱습니다. 벌레도 잘 먹지 않지요. 가구를 만들고 조각하는 데 제격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일부도 자작나무이군요.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실용성까지 뛰어납니다.

자작나무는 햇빛을 좋아해서 산불이나 산사태로 황폐해진 땅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빠른 속도로 자라 거대한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수명은 약 100년. 그 아래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씨앗이 날아와 자기 키보다 더 크게 자라면 그 나무들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진다니 어쩌면 숭고하고 장엄하기까지 하군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새삼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주는 나무가 곧 자작나무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